뉴욕의 책방
뉴욕의 책방
- 저자
- 최한샘 지음
- 출판사
- playground(플레이 그라운드) | 2012-12-25 출간
- 카테고리
- 여행
- 책소개
- 에드거 앨런 포, 마크 트웨인, 월트 휘트먼, 아서 밀러, 스콧...
슬프게도, 나는 동네 책방에 대한 대단한 추억은 별로 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 동네에 살았지만, 있는 서점이라곤 단 한군데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책방 안의 대부분의 책은 문제집이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책을 빌려다 주는 데엔 언제나 열심이었지만 내 손을 붙잡고 책을 사 주었던 기억은 별로 없는 거 같다. 그래서 나도 책을 사기보다는 빌리는 데에 더 익숙한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서점은 차라리 기업형 서점에 더 가까웠다. 광화문 교보나 종각 영풍문고가 그나마 내 환상 속의 서점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은데... 하지만 리뉴얼을 하고 나서는 광화문엔 발걸음이 뜸해졌고, 집에서 가까운 잠실 교보를 더 많이 가게 됐다. 잠실 교보는 왠지 광화문보단 더 생계형이란 느낌이고 설레임도 덜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책장 그득한 책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기에 좋아하긴 했다.
그러다가 홍대 땡스북스를 트위터에서 처음 접하고 가보게 됐다. 그리고 '아,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그런 서점이었구나! 이런 공간이 동네에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땡스북스에서 주로 다루는 범주의 책들은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아니다. 나는 아직 그래픽 노블에 익숙하지 않고, 요리책이나 여행책 그러니까 한 마디로 글씨 적고 그림 많은 책들에 대해 좀 꼰대같은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익숙하지 않은 분야의 책을 기웃거리게 만들 정도로, 서점이 독자에게 '이런 건 어때?' 라고 속삭이듯한 경험은 매우 흥미롭다. 사실 홍대를 그렇게 자주 가면서도 땡스북스에 가본 건 두어번 정도밖엔 안 되지만, 거기가 내 마음 속 이상적인 서점의 모습으로 정착한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일주일에도 몇번씩 사이트에 들어가서 지금 진행중인 이벤트를 체크하고, 추천도서를 훑어보고 하는게 즐겁다. 이 추천도서 코너를 통해 자그마한 출판사들도 많이 알게 됐고. 서점이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고, 오히려 책을 파는 공간을 빌려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곳이라는 걸 여기를 통해 처음 알았다.
역시 땡스북스 추천도서 코너를 통해 만난 이 책은 그런 서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업형 서점들조차 살아남기위해 분투해야 하는 한국의 서점 생태계에서 나의 인생의 일부분이 되어줄 수 있는 인디 서점이 동네에 태어나길 바라는 건 아직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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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와일드 북스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에 나오는 데제생트는 영국 여행을 가려다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더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그후 집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데제생트만큼 염세적이지는 않지만 덥고 햇살이 무섭게 내리쬐던 그날 맨해튼을 걷는 대신 이 서점에 앉아 대륙을 넘나들며 상상여행을 떠났던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블루스타킹스
서점이면서 카페이고, 행동주의자들의 센터임을 표방하는 이곳의 이름은 블루스타킹스!
서점 이름치고 좀 발칙하지 않은가? 1750년대초 영국의 엘리자베스 몬태규는 일종의 여성을 위한 문학살롱을 열었다. 그 모임에서는 여러분야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지적인 토론을 즐겼는데, 이는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의 잡담이나, 영양가 없는 사교놀이와는 차별화된 혁명적인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여성의 교육과 상호협동을 강조했으며 이 그룹의 멤버들은 독서나 예술 활동, 글쓰기와 같은 일에 힘을 쏟았다. 그 당시 예를 갖춘 모임에는 검은 실크 스타킹을 신고 가는 게 관례였는데, 이 문학살롱에 자주 초청되던 식물학자이자 번역가, 출판가였던 벤자민이라는 남성은 모임에 입고 갈 마땅한 옷이 없자 평상복에 파란색 모직 스타킹을 신고 나타났다고 한다. 그후 이 모임을 경멸하던 한 남성에 의해 이 문학살롱은 블루스타킹스 소사이어티 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그 연유로 블루스타킹스는 문학과 학문에 관심 있어하는 여성, 남자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소위 '잘 교육받은 유식한 여성'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19세기초에는 여성 참정론자들을 빗대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20세기초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해방과 혁명에 관한 내용을 담은 잡지를 출간했는데 그 잡지의 이름도 '블루스타킹스 저널'이었다.
-북스 오브 원더
고전 그림책 코너에선 어렸을 때 너무 좋아했던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재회했다. 한글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써 있던 게 'The giving tree'로 바뀌어 있을 뿐 어렸을 때 내가 좋아하던 그 책 그대로의 모습이 반갑다. 책은 그대론데 나만 훌쩍 나이를 먹었나보다. 오랜만에 녹색표지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니 그때가 생각나 자리에 선 채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나에게 보트를 줄 수 있니?"
"내 줄기를 베어서 보트를 만들려무나." 나무가 말했습니다.
"그럼 너는 멀리 떠날 수 있고... 그럼 너는 행복해지겠지."
그래서 소년은 나무를 베어다 보트를 만들어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무는 행복했지만...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릴 땐 그저 나무와 소년의 이야기로만 읽혔던 책이 이제는 엄마와 나의 이야기로 읽힌다. 늘 모든 걸 다 내어주며 나의 행복을 바라는 엄마. 나는 이제 결혼을 하고, 미국에 와 있고, 엄마 곁을 떠났다. 나무는 행복했지만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나에게 모든 걸 아낌없이 주었던 엄마도 내가 떠난다고 했을 때 실은 나무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미스터리어스 서점
오토 펜즐러는 오랫동안 여러 유명 작가들과의 많은 작업을 해온 까닭에 이 서점에는 다른 곳에서는 하기 힘든 특별한 몇가지 이벤트가 가능하다. 한번은 오토 펜즐러가 작가들에게 그들의 범죄소설 시리즈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탄생 비화가 담긴 프로파일을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이야기들은 작고 얇은 페이퍼백으로 출간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딱 100부씩만 하드커버로 제작하여 작가들에게 사인을 받은 뒤 도서 수집가들을 대상으로 특별한정판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 이벤트는 2006년 불황을 타계하기 위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인데 기대이상의 큰 인기를 끌며 서점을 위기에서 구해줬다고 한다. 오토 펜즐러가 이 프로파일 시리즈들을 한데 엮어 출판한 책이 바로 내가 사인받으려고 가져갔던 책 '라인업'이다.
또다른 특별 이벤트 중 한가지는 서점이 고객들에게 하는 크리스마스 선물. 오토 펜즐러는 매년 친한 작가들 중 한 명에게 짧은 이야기를 한편 의뢰한다. 단, 그 이야기는 미스터리, 범죄, 서스펜스적 요소를 담고 있을 것, 사건의 시간적 배경은 크리스마스 쯤일 것, 이야기 속 사건의 일부가 이 미스터리어스 서점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렇게 탄생된 이야기는 매년 딱 1000부가 인쇄되어 서점 고객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진다.
-레프트 뱅크
굉장히 작은 공간인데도 입구 맞은편 창가의 책장까지 가기 위해서는 책들이 쌓여 만들어놓은 오솔길을 걸어야 했다. 책 파는 곳 말고 그 어떤 다른 가게가 이렇게 진열을 어지럽게 해놓아도 멋있어 보일 수 있을까?
(중략)
난 이 서점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노란 불빛의 서점>의 저자가 '마음은 뜨겁게 불타오르는데 몸은 조용히 가라앉는 그 비밀스러운 곳'이라고 표현했던 구절이 떠올랐다.
-커뮤니티 서점
911 당시 이곳은 주민들의 쉼터이자 대책회의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이 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커뮤니티 서점의 주인과 서로 아는 사이. 이렇게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서점이었지만 지난 2007년엔 개점 이후 최악의 상황에 놓여 폐업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역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인 인터넷 서점과 전자책, 대형서점 체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네주민과 서점 사이의 40년 우정과 애정은 위기에서 빛을 발했다. 이 서점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힘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그들의 관계는 이전보다 더 돈독해져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누구도 부럽지 않은 마흔살 생일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서점을 나서는데 한쪽 벽에 붙어 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세상을 밝히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빛을 내는 초가 되거나, 그 초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거나.
There are two ways of spreading light: to be the candle or the mirror that reflects it.
아마도 이 불혹의 동네서점이 흔들림 없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이야기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