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누군가가 "아니, 뭐 재밌다고 해서 위대한 개츠비 영화를 봤는데 불륜 얘기지 뭐에요!" 라고 해서 상대의 몰취향에 학을 뗀 적이 있다. 단지 그런 기준으로만 따진다면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뿐만 아니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도,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그리고 이번에 읽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마저도 그저 불륜 얘기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것이다. 좀 더 고전적으로 말하자면 간통이고, 혹은 좀 더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바람 얘기인데, 문제는 이 중 어떤 소설도 그게 전혀 주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 그런데 그저 스토리에 들어간 한 가지 진행상황을 보고 불륜 = 나쁜 것 = 시바, 이딴 게 고전이라니! 라고 생각해버리면 아무것도 읽을 것이 없어진다.
물론 저 고전들을 단지 불륜에 초점을 맞춘 영화로 만들어 버렸다면 그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최근에 영화화된 위대한 개츠비는 그런 면에선 나쁘지 않았지만 안나 카레리나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그저 그런 불륜 얘기라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만들어 놓긴 했더라. 책 내용은 그게 아닌데도...
각설하고, 저 이야기들 중에서도 현대 드라마에 나온다고 가정했을 때 온갖 욕을 다 들어먹을 주인공을 꼽으라 한다면 바로 보바리 부인일 것이다. 따분한 남편을 버티지 못해 몇몇 상대와 만나고 결과적으로 재정적으로 가정이 파탄나고 마지막에 음독자살에 이르는 면에서 그러하다. 안나 카레리나의 안나는 그래도 아이 때문에 행동하기를 항상 주저했지만, 보바리 부인에겐 아이조차도 부차적인 존재였고 나중엔 가정에 빚더미까지 올려놓았으니 아마 드라마에 나온다면 시청자의 온갖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기 딱 좋은 캐릭터가 될 것이다.
그런 보바리 부인을 한발짝 물러서서 보면 대체 왜 저럴까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보바리 부인이라는 캐릭터의 안에 들어가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17세기 프랑스라는 배경 안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어렵다면 보바리 부인의 캐릭터를 현대로 데려오는 것이 더 좋겠다.
보바리 부인, 즉 엠마 보바리의 이름에서 유래한 보바리즘은 아래와 같은 의미라고 한다.
"쥘 드 고티에Jules de Gautier가 명명한 <보바리즘>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환상이 자아내는 병이다. 이 환상은 끝없는 불만을 유발한다. 이런 성격을 가진 인물은 이상의 안경을 쓰고 현실을 바라봄으로서 현실을 변형시킨다."
엠마의 <보바리즘>은 타인의 모습을 변형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또한 자신의 운명 이상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데서 숙명적이다. 색유리가 자아를 변형시켜 보여주기 때문에 엠마는 성취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히고 만다. 엠마는 현실 속에 몸담고 있으면서 몽상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몽상은 단순히 삶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침투하여 현실 그 자체를 변질시켜 버린다. 플로베르는 엠마의 성격적 본질인 <보바리즘>을 통해서 19세기 초반을 물들였던 낭만주의를,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 잔존하는 낭만주의적 기질을 유감없이 해부하여 보여줄 수 있었다. 단순히 <성 앙투완느의 유혹> 초고를 쓰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플로베르는 항상 자신의 내면 속에 뿌리깊게 도사리고 있는 낭만적 상상력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담 보바리>는 영원한 표본이다. 그 여자는 라마르틴과 위세를 능가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가 엠마 보바리이기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삶을 자신의 꿈으로 대치시킬 때 자신에게 주어진 저 삶의 가득한 모험들이 꿈에 의하여 다른 모습을 띠게 될 때, 그리하여 그런 모험들이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꼴로 보이게 될 때, 그녀가 현실에다가 거짓 옷을 입혀 로돌프나 레옹이라는 인물을 분장시킬 때 (...) 엠마는 단순히 낭만적인 여주인공만이 아니라 그의 시대를 초월하는 인물인 것이다. 물론 그 여자는 그의 시대 특유의 향수 냄새에 취해 있다. 그러나 엠마는 그런 것을 멸시하는 플로베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저 싸구려 향수에 홀려 있는 것이다>라고 모리스 바르데슈Maurice Bardeche는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플로베르 자신이 했다는 저 유명한 말, <엠마 보바리는 바로 나 자신이다>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플로베르에게 있어서 <마담 보바리>는 낭만주의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 구실을 하고 있다.
'책 > 읽고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자의 시간 (0) | 2014.03.24 |
---|---|
신 엔진 (0) | 2014.03.20 |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 (0) | 2014.01.26 |
세계 도서관 기행, 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 (0) | 2013.10.08 |
잔 (0) | 2013.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