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 'ㅅ'



당신 인생의 십 퍼센트

저자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출판사
북스피어 | 2014-11-0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에스프레소 노벨라란? 진하고 강한 향기를 담은 에스프레소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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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의 에세이 및 중단편이 실려있다. 

전반부의 할리우드에 관한 에세이가 재밌었음.

할리우드의 전반적인 분위기, 할리우드에서 얼마나 작가가 홀대받는지, 작가가 어떻게 작가로서의 입지를 가지고 작업할 수 있을지 등.

챈들러 특유의 직설적인 에세이 너무 좋다, 정말ㅋㅋㅋ 더 보고 싶다...


뒤의 중단편들도 재밌었다. 개인적으로 진주는 성가셔 재밌게 봤음ㅋㅋㅋㅋㅋ 등장인물들이 귀여웠다ㅋㅋㅋ


=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문학적 수준에 대해서라면, 한 유명 출판사의 판권지로 미루어 볼 때 내가 구역질나게 겸손을 떨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엄청난 진지함은 이 직업의 괴로운 특징 중 하나다. 작가로서 나는 그런 진지함을 품고 나 자신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소위 '과거에 등장한 오락 문학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금은 계몽 문학만을 받아들이는 속물근성'이라는 것에서 운 좋게 벗어날 수 있었다. 만화의 단순한 유머들과 문인의 무기력한 정교함 사이에는 아주 너른 영토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추리물은 중요한 지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추리물이라면 무조건 싫어한다. 좋은 사람에 대한 추리물만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폭력과 사디즘을 서로 바꿀 수 있는 용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으며, 종속절과 까다로운 구두점과 가정법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탐정 소설을 하위 문학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다.

-p14


이 단편집에 실린 이야기들에는 쓰인 지 십 년, 혹은 십오 년이 지난 후에도 누군가를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추리소설은 과거의 그림자에 머물 필요가 없는 종류의 글이며, 고전에 빚진 바도 거의 없다. 현재 생존 작가가 <헨리 에즈먼즈The History of Henry Esmond>보다 더 나은 역사 소설을, <황금 시대The Golden Age>보다 더 나은 동화를,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보다 날카로운 사회적 소품을, <포인턴 저택의 소장품The Spoils of Poynton> 보다 더 우아하고 세련된 환기적 작품을,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보다 거대하고 풍부한 배경을 써내기란 불가능 그 이상이다. 하지만 <바스커빌 가의 개The Hound of the Baskerville>나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보다 더 그럴듯한 추리소설을 고안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것이다. 오늘날은 그러지 않기가 더 어려우리라. 범죄나 수사에 '고전'이란 없다. 전혀 없다. 고전의 평가 기준 틀 내에서 보자면 그것만이 유일한 판단 방법인데, 고전이란 그 형태의 가능성을 다 소진하고도 능가할 수 없는 작품을 말한다. 어떤 추리물도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에 근접한 작품도 극히 소수이다. 바로 이것이 다른 점에서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끊임없이 성채를 공격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p15~16


나는 할리우드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나 지속되는 이유도, 위상을 위한 어떤 쓰라린 투쟁으로부터 그것이 생겨났는지도, 형편없는 영화들로 돈을 얼마나 벌어들이는지도 알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그 결과 시나리오 에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런 시스템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점에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재능을 재능이게 하는 권리를 허락하지 않고 재능을 착취하는 것이 이 시스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권리는 허락될 수 없을 것이다. 재능을 파괴할 수만 있을 뿐이며, 정확하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ㅡ파괴할 것이 있을 때 말이지만.

-p38


할리우드에서는 작가를 의미 있는 예술가로 관객에게 내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에 담긴 어떤 예술성에 대한 작가의 결정적인 기여를 대중에게 숨기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광고판과 신문 광고란에서 작가의 이름은, 겨우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린 가장 미미한 단역배우의 이름보다 더 작게 실릴 것이다. 그리고 주중이 되어 광고 크기가 줄어들면 가장 먼저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의 입이나 라디오 홍보에서 가장 마지막에, 가장 적게 언급될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작업한 영화는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지만(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나는 영화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또 다른 영화사에서 내가 쓴 이야기로 제작하여 엄청나게 성공한 영화가 있는데, 홍보 과정에서 이야기의 몇몇 구절이 그대로 사용됐지만, 내 이름은 라디오든 잡지든 광고판이든 신문 광고든, 내가 보고 들은 매체에서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ㅡ엄청나게 많은 광고를 보고 들었는데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무시는 전혀 중요치 않다. 책을 내는 작가에게 할리우드에서 하는 부업은 하찮을 뿐이니까. 단, 자신의 일이 전부 할리우드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하찮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전문적인 시나리오 작가를 영화 제작에서 보조적인 역할로 전락시키려는 의도적이며 성공적인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겉으로는 대우를 받으면서도(한 방에 있을 때는) 본질적으로는 무시당하고, 작가가 이룬 가장 뛰어난 결과물에서조차, 그렇지 않았다면 배우, 제작자, 감독에게 돌아갔을 어떤 명예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p48~49


할리우드에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애처롭게도 많지 않다. 비현실적인 세계에 사는 즐거움, 대부분 형편없는 영화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마시는 협소한 무리와의 교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불친절한 식당들 중 어딘가에서 퍼 마시고 있는 유명 배우들을 보는 의심쩍은 즐거움 정도가 있을까.

할리우드 사회가 돈에 물든 여타 사회보다 더 지루하거나 방탕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럴 수 없음을 신이 아시리라. 하지만 위대한 예술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의 필수적인 기술에 평생 헌신하는 것치고는 그 보상이 상당히 약한 편이다. 진실은 이러리라 생각한다. 할리우드의 베테랑들이 자신이 얻는 것이 얼마나 조금인지, 얼마나 많은 우둔한 이기주의자에게 웃음을 지어야만 하는지, 얼마나 많은 위선적인 사람을 친구처럼 대해야 하는지, 진정한 성취를 이루어낼 가능성은 얼마나 적은지, 자신의 삶에 얼마나 많은 천박한 쓰레기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표면적인 친근함은 즐겁다ㅡ거의 모든 사람이 소매에 칼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영화 산업을 진지하게 여기는 남녀 동료들과 함게 근무하며 생기는 동료애는 작가의 외로운 영혼에 희미한 열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장을 보고, 원한다면 스스로 생각하기도 하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 쉽게 잊히고 만다. 할리우드에서는 심지어 수표조차 직접 쓰지 않는다. 그리고 제작사나 영화사가 좋아하리라 기대되는 것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이 있다고 본다. 여러 희망이 있다. 냉혹한 왕조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고, 독재적인 제작자는 이미 조금 확신을 잃었으며, 머리가 무거워 휘청이는 감독은 자기 영화사에서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이다. 얼마 더 지나면 테크니컬러조차 그를 구하지 못하리라. 부패하고 임시변통적인 시스템은 지나갈 것이며, 허풍스러운 거물들이 다음 사실을 알게 되리라는 희망도 있다. 시나리오는 작가들만이 쓸 수 있으며 오직 자부심을 가진 독립적인 작가들만이 좋은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음을, 그리고 현재 그런 사람들을 취급하는 방식은 영화가 살아가는 힘을 파괴할 뿐임을 알게 되리라는 희망이.

그리고 할리우드 작가들 스스로가ㅡ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ㅡ 영화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마추어나 항상 다른 사람이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하는 미숙한 작가들의 직업이 아님을 깨닫게 되리라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희망도 있다.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자들이 자신의 창의성, 상상력, 진실성을 바닥까지 짜내게 하는 것은, 기술자로서 작가들이 지닌 고유한 약점인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고액을 받는 시나리오 작가 중 사분의 일만이라도, 자력으로 총체적이며 촬영 가능한 시나리오를 써 내면서, 영화사의 간섭과 심의는 배우들에게 투자한 금액을 보호하고 명에 훼손과 검열에서 합리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정도만 받는다면, 제작자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 결합되는 다양한 기술들을 조화시키고 조정하는 자신의 진짜 역할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ㅡ으스대는 그의 영혼을 가엾게 여기길ㅡ자신이 쓰려고 했던 대로가 아니라(쓸 줄 안다면 말이지만), 구상되고 쓰인 대로 영화를 제작하는 수치스러운 과업을 이행하는 역할로 격하될 것이다.

-p49~52


요지는 형편없는 영화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나 심지어 영화는 평균적으로 다 형편없는지의 여부에 있지 않다. 영화라는 매체가, 그 영화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들이 경의를 품고 대할 만큼 위엄과 성취를 지닌 예술인가 하는 점에 있다. 영화를 조롱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영화는 대중적인 오락물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영화를 엄벌에 처했다며 만족해한다. 마치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지성인 대부분이 여전히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 연극은 아테나 시민들이 즐기던 대중적인 오락물이었다. 경제적, 지리적으로 한계는 있었지만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도 그러했다. 유럽의 대성당들은 오후를 즐길 목적으로 지어지지는 않았으나, 보통 사람들에게 미학적이며 정신적인 영향을 미쳤다. 늘 그렇진 않지만 오늘날에도 바흐의 푸가와 합창곡, 모차르트와 보로딘과 브람스의 교향곡,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스카를라티의 피아노 소나타, 그리고 한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음악이 라디오 덕에 대중오락이 되었다. 모든 바보가 대중오락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모든 바보가 만화보다 더 문학적인 무엇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예술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대중오락화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잊혀버린다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른다.

(중략)

하지만 영화는 가짜 예술이 아닌 것처럼, 문학이나 연극을 옮긴 것도 아니다. 영화는 그 모든 요소를 포함하지만 본질적인 구조상 음악에 훨씬 더 가깝다. 가장 멋진 효과가 정확한 의미와는 별개일 수 있다는 점에서, 장면의 전환이 가장 멋진 장면조차 더 감명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삭제할 수 없는 디졸브와 카메라 움직임들이 삭제 가능한 줄거리보다 감정적으로 훨씬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는 예술일 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수백 년간 진화되어 온 완전히 새로운 예술이다. 우리 세대가 크게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기도 하다.

-p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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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달

저자
루이즈 페니 지음
출판사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06-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치명적인 은총〉에 이은 2년 연속 애거서상 수상작 앤서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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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네... - T. S. 엘리엇, <황무지>


T. S. 엘리엇의 시에서 따왔다는 제목인 The Cruelest Month.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제 3권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제까지 봤던 가마슈 경감 시리즈 중 가장 재미있게 봤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감정의 골자가 공감가서였을까.


사람들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과 경쟁한다. 형제자매, 친구, 부모, 반려자 등.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경쟁하고, 패배했다고 느꼈을 때 상대를 질투하면서도, 그걸 인정하기 어려워서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자신마저 속이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꾹꾹 눌러담았던 감정들이 폭발하는 순간, 가공할만한 파괴력으로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 사건에서 사망한 사람은 하나이지만,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범인과 피해자를 제외한 여러 사람들 역시도 바로 이 감정에 시달린다. 심지어 주요 등장인물까지도. 가마슈와 미셸, 피터와 클라라까지. 마지막에 가마슈가 불러모은 사람들이 원으로 둘러앉았을 때, 범인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 교차를 설명해내는 부분이 재미있으면서도 섬뜩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힘들었을 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다. 3년전 연말에 이런저런 일로 너무 힘들어서 SNS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근황을 보는 것조차 너무 괴로웠다.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자리를 잘 잡고 즐겁게 사는 거 같은데 거기에서 나만 소외된 거 같은 그런 피해의식과 함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 비참해지는 나 자신이 가장 싫었다. 그래서 차라리 아예 보지 말자고 생각하고 한동안 모든 SNS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런 감정은 자신이 얼마나 단단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는가와는 또 별개의 문제인 거 같다. 상대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상대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상대를 질투하는 감정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손에 쥔 것의 소중함은 모른다.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에만 집중하고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런 감정이 자신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손에 쥔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을 때 그들을 축복하며 바라보는 것은 간단해보이지만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다시 3년전으로 돌아갔을 때 그 감정을 극복할 자신은 아직도 없다.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밖에는. 이런 때 한동안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한텐 도움이 되었던 거 같다. 아예 주변에 시선을 돌리는 것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것. 내가 유치한 감정의 노예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보단, 나란 인간이 이런 감정에 지배당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편해질 필요도 있다.


여하간 예전의 내 생각이 나서 참 공감하며 봤던 책. 루이즈 페니가 묘사하는 감정들이 참 좋다. 사람의 어두운 이면을 그리면서도,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것. 그런 저자의 시선이 바로 가마슈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드디어 이번 편부터 가마슈의 약점 역시도 드러나는데, 앞으로 주요 등장인물들을 둘러싼 일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할만하다.


=


부드럽게 녹은 카망베르 치즈가 메이플 시럽을 발라 훈제한 햄과 얇은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한 패스트리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황금빛 크로크므시외를 썰면서 피터가 웃었다.

- p14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 줄은 알겠네." 가마슈도 보부아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하지만 내 믿음은 날 안심시키지 죽이지는 않네. 내 믿음이 곧 나일세, 장 기. 그러니 날 해치진 않아."

"경감님은 영혼을 믿으시죠?" 보부아르는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성당에 다니시는지 모르겠지만 신은 믿으시겠죠. 그녀가 사악한 영혼을 불러내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천사들을 부르겠네." 가마슈가 미소를 지었다. "이봐, 장 기. 삶의 어떤 시점에서 우리는 모두 그 질문과 맞닥드려야 하네. 자네가 믿는 게 뭐지? 내게는 적어도 나만의 답이 있네. 내 답이 날 죽인다면 죽게 되겠지. 하지만 달아나지는 않을 거야."

"달아나시라는 게 아닙니다. 도움을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가마슈는 망설였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자네는 자네 일을 하게."

가마슈가 보부아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는 그 때 무엇이 가마슈를 죽일지 깨달았다. 사악한 영혼도, 악귀도, 유령도 아니었다. 그의 자존심이었다.

-p205~206


"가까이 있는 적이오. 심리학적인 개념이에요. 똑같아 보이는 두 개의 감정이 실제로는 정반대인 현상을 일컫는 표현이죠. 하나의 감정이 또 하나의 감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는 건강한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병들고 왜곡된 감정일 때 쓰는 말이에요."

(중략)

그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예를 들어 줄 수 있습니까?"

"세 가지 조합이 있어요." 이유도 모르는 채 머나 역시 앞으로 몸을 숙이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집착은 사랑인 척하고, 동정은 연민인 척, 무관심은 평정심인 척 속이죠."

(중략)

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과 연민이 제일 이해하기 쉬워요. 연민은 교감을 필요로 하죠. 고통받는 사람과 동등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요. 하지만 동정은 달라요.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은 그 누군가에게 우월감을 갖는 거라고 할 수 있죠."

"두 감정은 서로 잘 구별이 안 되는데요." 가마슈가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에요. 감정을 느끼는 당사자에게도 구별이 어렵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연민을 느낀다고 주장해요. 연민은 숭고한 감정 중 하나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건 동정이에요."

"그렇다면 동정이 연민 가까이 있는 적이겠군요." 곰곰이 생각해 본 가마슈가 천천히 말했다.

"동정은 연민처럼 보이고, 동정을 느끼면 연민을 느낄 때와 비슷한 행동 양상이 나타나죠. 하지만 연민과는 정반대의 감정이에요. 동정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연민이 들어올 틈은 없어요. 동정은 더욱 숭고한 감정인 연민을 파괴하고 몰아내 버리죠."

"실제로는 다른 감정을 느끼면서 더욱 숭고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자신을 속이기 때문이군요."

"자기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이는 거죠." 머나가 말했다.

"그럼 사랑과 집착은 어떻습니까?" 가마슈가 물었다.

"엄마와 아이가 대표적인 예죠. 어떤 엄마는 아이가 더 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준비를 해 주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죠.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게요.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돕죠. 이게 진정한 엄마의 사랑이에요. 하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 다른 엄마들은 아이에게 매달리죠. 아이와 같은 도시, 같은 동네로 이사를 가고요. 아이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아이를 질식하게 만들죠. 아이를 조종하고 죄의식을 빌미로 불구가 되게 하죠."

"불구가 되게 한다고요? 어떻게요?"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 걸러요."

"하지만 그건 엄마와 아이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겠죠." 가마슈가 말했다

"그렇죠. 우정이나 결혼에서도 생길 수 있어요. 다른 친밀한 관게에서도요. 사랑을 상대방을 위한 최선을 바라죠. 집착은 상대방을 인질로 삼고요."

가마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 인질은 달아날 수 없다. 달아나려 하면 비극만이 따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은요?" 그는 다시 앞으로 몸을 숙였다. "뭐였죠?"

"평정심과 무관심이오. 제 생각에 가장 끔직하고 가장 해로운 조합이에요. 평정심은 균형이에요. 일상을 압도하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그 일에 대한 강한 감정을 느끼게 돼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일을 극복할 능력도 있죠. 경감님도 보셨을 거예요. 아이나 배우자를 잃은 후에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을요. 심리학자다 보니까 전 항상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돼요. 믿기 힘들 정도의 고통과 슬픔을 겪는 사람들이오. 하지만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결국 본질에 닿게 되죠. 그걸 평정심이라고 해요. 상황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말하죠."

가마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당한 사건을 극복한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 살인범을 용서하는 사람도 있었다.

"평정심과 무관심은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여전히 두 감정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그가 물었다.

"생각해 보세요. 감정을 절제하는 모든 사람들을요. 불행 앞에 끄덕도 하지 않죠. 비극이 일어나도 냉정하게 대처해요. 정말로 그렇게 용기있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녀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정신이상자 같아요. 그냥 고통 자체를 느끼질 못해요. 왜인 줄 아세요?"

가마슈는 가만히 있었다. 뒤에서는 마치 대화를 방해하려는 것처럼 유리창에 폭풍이 거세게 부딪고 있엇다. 우박이 유리창에 내리꽂혔고, 마을 저편을 뒤덮고 있는 눈발이 유리창을 가득 메웟다. 그와 머니는 그들만의 세상에 철저히 갇힌 것 같았다.

"그들은 타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느끼지 않죠. 인간성의 덫에 싸여 있는 '보이지 않는 인간(흑인 차별 문제를 다룬 랠프 엘리슨의 소설 제목으로 백인들의 눈에 흑인은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취급당한다는 내용. 보이지 않는 인간은 흑인과 마찬가지로 본연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같아요. 그들의 내면에는 공허함뿐이죠."

가마슈는 피부에 찬기가 스며드는 걸 느꼈고 재킷 안의 팔에 소름이 돋고 있음을 알았다.

"문제는 한 감정가 다른 감정을 정확히 구별하는 데 있어요." 머나가 식료품상을 계속 주시하며 속삭였다. "평정심이 있는 사람들은 놀랄만큼 용감해요. 고통을 흡수해 온전히 느끼고 놓아 보내죠. 그리고 이거 아세요?"

"뭘요?" 가마슈가 속삭였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무관심하기만 한 사람과 똑같아 보여요. 냉정하고 차분한 데다 아주 침착하니까요.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존경하죠. 하지만 정말로 용감한 사람은 누구이고, 가까이에 있는 적은 누구일까요?"

가마슈는 난로로 덥혀진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순간, 그는 알아차렸다. 적은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p33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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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렐란드라

저자
C. S. 루이스 지음
출판사
홍성사 | 2011-07-22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낙원과도 같은 페렐란드라(금성)로 간 랜섬은, 그곳을 타락시키려...
가격비교


나니아 연대기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우주 3부작 중 두번째. 사실 첫번째인줄 알고 읽었는데 책을 편 순간 2권이라는 메시지가 뙇! 아놔...

전작인 침묵의 행성 밖에서 를 읽지 않아도 보는데 큰 무리는 없었으나, 초반에는 약간 헤맸다.


SF를 이제까지 읽으면서 이만큼 기독교적인 메타포가 가득찬 SF를 읽은 기억이 없는 거 같다. 종교에 관련된 SF는 의외로 찾으면 좀 있는데, 이렇게 성경적인(바이블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말 그대로 기독교의 성경적인) SF는 처음 본다. 분위기가 상당히 독특하고, SF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흔히 상상하게 되는 이미지하고도 많이 다르다.


C.S 루이스는 그냥 나니아 연대기 작가로 생각할 때는 몰랐는데, 예전에 '예기치 않은 기쁨'을 찾아 읽으려고 하니 이게 기독교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어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독교 사상가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페렐란드라는 금성을 지칭하는 소설 내의 단어이다. 전작인 '침묵의 행성 밖에서'는 말라칸드라(화성)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 거 같다. 하지만 화성과 금성은 지구에서 갈 수 있는 거리의 행성이라는 점에서 선택되었을 뿐인듯, 우리가 생각하는 화성과 금성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 중 페렐란드라는 기독교 창세기의 에덴동산을 연상케하는 배경이다. 마치 뱀의 유혹의 빠지기 전 하와의 모습을 형상화한듯한 초록 여인이 등장하고, 주인공 랜섬의 이미지는 예수를 연상케한다. 웨스턴은 하와를 꼬인 뱀의 이미지와 닮아 있다. 소설 내내 마치 선악과의 유혹의 빠지기 전의 에덴동산을 형상화하려는 듯한 저자의 꼼꼼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아주 따뜻하고 아름다우며, 또한 이색적이다. 페렐란드라의 땅에 관한 묘사, 과실에 관한 묘사, 초록 여인의 표정에 대한 묘사, 웨스턴의 인상에 대한 묘사까지.


이 우주 3부작은 루이스가 톨킨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우리 중 한 사람은 시간 여행에 관한 책을 쓰고, 다른 한 사람은 공간 여행에 관한 책을 쓰자"고 하여 나온 책이라고 한다. 루이스가 공간 여행을 택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 우주 3부작이다. 톨킨이 쓰기 시작한 시간 여행에 관한 책은 '잃어버린 길'이었는데 이는 미완으로 남았고, 다시 쓴 책이 바로 반지의 제왕이라 한다. 책들 사이에 숨겨진 재밌는 이야기들이 참 많다.


=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바다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었다. 영양처럼 생긴 동물이 부드러운 코를 겨드랑이에 들이밀자 무심코 쓰다듬었다. 웃음을 터트린 아까 그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쭉 떠다니는 섬의 물가에 앉아만 있었을 모습이었다. 랜섬은 그렇게 차분한 얼굴은 처음 보았다. 모든 면에서 인간의 모습인데도 정말이지 천상에서만 볼 듯한 얼굴이었다. 후에 그는 그것이 체념이 없어서라고 결론지었다. 지상의 얼굴들에는 깊은 고요와 함께 최소한이라도 체념이 깃들기 마련이니까. 이것은 폭풍우를 겪은 적이 없는 평온함이었다. 백치 같기도 하고, 불멸성 같기도 했다. 지상의 경험에 짓눌리지 않는 마음 상태일 터였다.

-p77


눈앞의 남자는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손가락을 힘 있게 움직인 것으로 볼 때 그는 틀림없이 웨스턴이었다. 그런 면으로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알아볼 수 없기도 하다는 점이 두려웠다.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오히려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개구리를 괴롭히다가 고개를 들자,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얼굴이 드러났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한 그는, 인간들이 시신을 볼 때 흔히 보이는 모든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표정한 입, 깜빡이지 않는 눈, 왠지 무겁고 무기체 같은 주름진 뺨이 분명히 말했다. '나는 당신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우리 사이에 공통점은 없소' 라고. 바로 이것이 랜섬의 입을 막고 있었다. 거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호소나 협박이 의미가 있을까? 사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확신이 모든 정신적인 습관과 믿기 싫은 욕망을 밀치고 의식 속을 파고 들었다. 완전히 다른 종류의 생명이 페렐란드라에서 웨스턴의 몸을 차지해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썩지도 않는 몸이었다. 웨스턴 자신은 없어진 것이다.

그것은 말없이 랜섬을 바라보더니 미소 짓기 시작했다. 악마 같은 미소에 대해 자주 들어 보았을 것이다. 랜섬 자신도 자주 말한 바 있지만 진짜 악마 같은 미소가 뭔지 모르고 한 말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 미소는 냉혹하지도, 분노에 차 있지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싹할 정도로 순수하게 반가움을 드러내면서 쾌락의 세계로 랜섬을 부르는 것 같았다. 마치 모든 인간이 그런 쾌락 속에 있는 것 같고 그 쾌락들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몰래 하는 짓도, 부끄러워할 짓도 아니었고, 공범자 같은 구석도 전혀 없었다. 그것은 선량함과 충돌하지 않았고, 마치 선은 없다는 듯이 무시했다. 랜섬은 이전에 본 것은 미온적이고 거북할 정도의 사악한 시도에 불과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이 존재는 전심을 다하고 있었다. 극단적인 악은 모든 갈등 단계를 지나서, 무서우리만치 순수함과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초록 여인이 미덕을 초월하듯 그것은 악을 초월했다.

-p159


랜섬은 오래 전 화성에서 오야르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그대가 여기 있는 방식과는 다르다."

생명체들이 그를 기준으로 볼 때는 움직이지 않지만 실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가 있는 이 움직이지 않는 세상 같은 행성ㅡ실제로 세상ㅡ이 그들이 볼 때는 움직이며 천상들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계곡과 나란히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가만히 서 있었다 해도, 그들은 랜섬이 보지 못하게 그 앞을 휙 지났을 것이다. 행성의 자전과 태양 주변의 공전으로 인해 두 배로 뚝 떨어졌을 것이다.

랜섬은 그들의 몸이 희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깨부터 다양한 색깔이 번쩍이며 목을 타고 올라 얼굴과 머리 위에서 깜빡거리더니, 깃털이나 후광처럼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그는 내게 이런 색깔들을 기억할 수 있다고, 다시 보면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시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했다. 우리와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도 똑같은 설명을 한다. 신체를 초월한 존재들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로 하면, 사실 그들은 우리의 망막에 영향을 주지 않고 뇌의 관련 부분을 직접 조작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실은 가시권 밖에 있는 스펙트럼의 색깔들을 눈이 받아들일 때 느끼는 감각들을 그들이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다. 엘딜마다 '깃털'이나 후광이 전혀 달랐다. 화성의 오야르사는 금속성의 차가운 아침 색깔들로 빛났다. 순수하고 딱딱하고 긴장감을 주는 느낌이었다. 금성의 오야르사는 따스한 광채로 빛나며, 풍성한 식물의 생명력 같은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랜섬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명화에서 묘사한 '천사'는 꽤 상상을 잘한 것이었다. 얼굴의 다채로운 변화가 인간 얼굴을 연상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각각의 얼굴에, 너무나 또렷해서 가슴 아리고 눈부셨던, 변화 없는 한 가지 표정이 박혀 있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엘딜들의 얼굴은 아이기나 섬(아테네 남쪽에 위치한 섬)에 있는 조각상들처럼 '원시적'이고 부자연스러웠다. 이 한 가지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랜섬은 단언할 수 없었다. 결국 자비로움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인간의 자비로운 표정과는 뜨악할 만큼 달랐다. 우리는 늘 인간의 자비심이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꽃피거나 애정 어린 상태로 치닫는 것을 본다. 그런데 여기에 애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천만 년 거리에서도 애정에 대한 희미한 기억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먼 미래에도 애정이 피어날 수 있는 뿌리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날카로운 번개처럼 순수하고 영적이고 지성적인 사랑이 나왔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과는 너무도 달라서, 그 표정은 자칫 사납다고 오해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29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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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먹어보는 김록훈 베이커리

저녁 늦게 갈 거라면 인기템은 미리 예약하고 가는 게 좋은듯!





아름다운 앙버터느님이시다..

바게트가 바삭바삭함

개인적으로 르빵 앙버터가 더 취향이긴 한데 여기도 맛있음




크랜베리 브라우니였나

대표메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생각보다는 그냥 그랬다



신사역의 꽤 오래된 빵집 도쿄팡야


귀여운 일본식 빵집


막 빵이 나오고 있는 시점이라 빵집 안에 빵냄새가 가득!


요 식빵 너무 귀여워서ㅎㅎㅎ


왠지 일본식 빵집의 상징같은 말차 메론빵


하지만 나는 슈크림을 사보았다


꺄 맛나보이는군!


일본식 녹차도 한잔


크림이 가득하오...


흘러내리고있다아아아아아아.........

개맛존맛ㅠㅠㅠㅠㅠㅠㅠ




원래는 서울대입구가 본점이라고 했던가...

여튼 규동만 전문으로 하고 있는 지구당이다.


가게 컨셉이 손님과는 일절 대화를 하지 않는다 이고

조용히 맛있게 먹고 조용히 나간다 이기 때문에

인터넷 보니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같이 갔던 혜수가 예전에 가서 주인한테 뭐 물어보려고 말걸었다가 씹혔다곸ㅋㅋㅋㅋㅋㅋ

뭐 컨셉도 컨셉이지만 조금 유도리는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흠...


떠들썩하게 먹고 주인과의 정이 넘치는 가게를 기대한다면 반드시 실망할 것이다

그에 반해 조용한 곳에서 맛있게 한끼 먹고 자리 옮겨 카페 가서 수다를 떨겠다 정도의 목적으로 가면 성공할만한 곳


밖에서 인터폰 누르고 인원수를 말하면 들여보내준다

대기는 밖에서 해야하나봄


전석 바 모양의 다찌석이라고 보면 된다

기본 셋팅

미소시루는 평범하다


우선 반숙계란을 내어줌

규동이 나오면 얹어서 풀어먹는다




마침내 나온 소고기덮밥!


소고기에 기름기도 적당히 있고 무척 맛있다

간은 나한텐 적당한 느낌 아주 짜지도 않고


이렇게 반숙계란을 얹어서


터뜨려서!


슥슥


잘 먹었습니다!


레귤러가 6천인가, 곱빼기가 7천인가 뭐 그렇다

신사역에 먹을만한 밥집 정말 없는데 신사역 가서 밥 생각나면 자주 갈듯

맥주 가격도 개념있다 단 인당 1병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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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은총

저자
루이즈 페니 지음
출판사
피니스 아프리카에 | 2012-02-1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전무후무한 애거서상 4년 연속 수상에 빛나는 루이즈 페니의 두 ...
가격비교


루이즈 페니의 가마슈 경감 시리즈 2권.

가마슈 경감 시리즈는 다음과 같은 순서인데, 번역본은 하나를 띄우고 앞의 5권만 나온 상태다.


Still Life (2005) : 스틸 라이프

A Fatal Grace (Alternate title: Dead Cold) (2007) : 치명적인 은총

The Cruelest Month (2008) : 가장 잔인한 달

The Murder Stone (A Rule Against Murder in U.S.) (2009) : 국내 미번역

The Brutal Telling (2009) : 냉혹한 이야기

Bury your Dead (2010) : 네 시체를 묻어라

A Trick of the Light (2011) 국내 미번역

The Hangman (2011) 국내 미번역

The Beautiful Mystery (2012) 국내 미번역

How the Light Gets In (2013) 국내 미번역

The Long Way Home (2014) 국내 미번역


모두 '피니스 아프리카에'라는 출판사에서 발간중이다. 지난번 장르문학 부흥회 광고를 보다가 알게 된 출판사. 사실 나는 여기에서 맨 마지막 4강 박상준 대표님이 하시는 SF관련 강좌만 들어서 몰랐는데, 그 날 만났던 같은 책모임에 계시던 분이 이 날 받은 미스테리 목록을 공유해주셔서 알게 됐다.


전작, 그러니까 가마슈 경감 시리즈 제 1권인 스틸라이프의 성공에 힘입어서일까. 치명적인 은총에서는 확실히 루이즈 페니가 신나고 자신감 넘치는 상태에서 슥슥 써내려갔다는 즐거움이 느껴진다. 두께도 스틸 라이프의 두 배 정도. 두꺼운 미스테리책 너무 좋다. 한 권 끌어안고 죽죽 읽어내려갈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음.


전작 스틸라이프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던' 제인 닐이 살해당했다면, 이번 치명적인 은총에서는 완벽하게 대조적으로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CC 드 푸아티에라는 사람이 살해당한다. 전작에서 제인 닐의 죽음이 스리 파인스에 그림자를 드리웠다면, 제인의 죽음에서 이제 막 회복하려고 하는 스리 파인스에 CC 드 푸아티에가 이사 오면서 다시금 이 마을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리고 그 예감은 CC 드 푸아티에가 살해당하면서 절정에 달한다. 아무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지만,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다. 그녀의 존재가 죽어서 사라진 이후에 기묘한 안도감에 빠지는 사람들의 심리까지도.


개인적으로 스틸 라이프에서는 사람들의 심리묘사가 좋았던 반면 사건의 얼개 자체는 비교적 단순하다 느꼈는데, 이번 치명적인 은총에서는 그 두 가지의 균형이 상대적으로 잘 맞았다 생각된다. 루이즈 페니 특유의 베이커리와 음식 사랑(이 분 글로 먹방 찍으시는듯;), 자주 언급되는 시들, 미술에 대한 애호 역시도 그대로 살아있어 보다 안정적으로 저자가 한 시리즈의 터를 잘 닦아나가고 있구나 라는 느낌을 준다.


디테일에선 전혀 관계가 없는데 초반부터 엘러리 퀸의 모 책이 생각났는데 마지막에서 맞아 떨어져서, 으음 역시... 스스로의 오감에 좀 놀랐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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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자에게 바치는 저자의 서문


당신이 이 책을 들고 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기쁩니다. 나는 캐나다 퀘벡 주에 있는 집에서 이 길을 쓰고 있습니다. 벽난로 옆에서요. 우리는 몬트리올 남부, 두 개의 산 사이에 있는 시골에 삽니다. 밖은 굉장히 춥고, 일기예보에서는 눈이 더 내릴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집 안에서 차를 마시고 있으니 안락하고 따뜻하군요. 남편 마이클은 핫 초콜릿, 나는 홍차입니다. 물론 케이크도 좀 곁들이고요.

지금 당신이 어디서 이 글을 읽고 있을지 궁금하군요. 동네 서점인가요? 어쩌면 집일 수도 있겠지요. 나는 한국에서 사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어쩌면 당신도 이곳 캐나다에서 사는 내 모습을 그려보려 할지 모르겠군요.

당신이 이 책을 다 읽게 될 즈음에는, 이곳에서의 삶은-그리고 가끔 죽음도-어떨지 구체적인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에밀리 디킨슨은 소설이란 우리가 평소에는 절대 갈 수 없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배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작품에서 바라는 모습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느끼고 카페라테와 장작 냄새를 맡으며 버터를 듬뿍 넣은 크루아상 맛을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깔려 있는, 이곳의 지명이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실제 모습 그대로입니다. 정서적 풍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실과 슬픔, 우정과 친밀함, 그리고 사랑. 내 작품들은 분명 살인을 다루는 추리소설이지만 사실은 죽음보다 삶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이 어디에 살고 있든 서로의 감정을 충실히 나누려 합니다.

(후략)

- p4~5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나지막한 산등성이 정상에 오르자, 산과 숲 사이에 숨은 마을 하나를 발견했다. 머나는 차에서 내려 주변 경치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 무엇보다 이 마을의 존재가 놀라웠다. 때는 늦봄이었고, 햇빛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오래된 석조 제재소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하얀 참나무 판자로 지은 작은 교회를 지나 마을 한쪽으로 구불구불하게 흘러갔다. 마을은 비포장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는 원형 모양이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마을 광장이 있었고, 오래된 집들이 그 광장을 둘러쌌다. 몇몇 집들은 가파르게 경사진 양철 지붕과 좁은 지붕창을 한 퀘벡 스타일이었고, 어떤 집들은 베란다가 노출되어 있는 구조로 된 참나무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집만은 자연석으로 지어져 있었다. 한 개척민이 앞으로 다가올 살인적인 겨울을 이기려 혈안이 되어, 들판에서 옮긴 돌로 직접 지은 집이었다.

그녀의 눈에 광장 연못과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세 그루의 위풍당당한 소나무가 들어왔다.

머나는 퀘벡 주 지도를 구입했다. 2, 3분 후 조심스레 지도를 접어 들고는, 어이가 없어서 차에 몸을 기댔다. 이 마을은 지도에 나와 있지 않았다. 지도에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사라져버린 장소도 나와 있엇다. 아주 작은 낚시터 마을은 물론이고 집 두 채에 교회 하나 정도 되는 마을 공동체도 죄다 나와 있었다.

그러나 이 마을만은 지도에 없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이 정원을 가꾸고 개를 산책시키며 연못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이 말은 브리가둔(1947년에 제작된 뮤지컬 제목이자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스코틀렌드 마을 이름. 이 마을은 백 년 주기로 딱 하루씩만 모습을 드러낸다)같은 곳일지도 몰라.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이 마을을 찾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마을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여전히 머나는 주저했다. 분명 이 마을에는 그녀가 갈망하는 것들이 없을 터였다. 차를 돌려 지도에 나와 있는 윌리엄스버그로 향하기 직전, 그녀는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스리 파인스는 그녀가 갈망하던 것들을 갖추고 있었다.

스리 파인스에는 크루아상과 카페라테가 있었다. 감자튀김을 곁들인 스테이크와 '뉴욕 타임스'도 있었다. 빵집, 비스트로, 비앤비, 잡화점도 있었다. 평화와 고요함이 존재하는 동시에 웃음도 있었다. 커다란 즐거움과 깊은 슬픔이 상존했고, 양자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기품도 느껴졌다. 우정과 다정함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미다락이 있는 빈 가게도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녀를.

머나는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 p28~29


"사실, 난 다른 시가 떠올랐어요.

'이 세상이 그를 오랫동안 괴롭힌 나머지

그는 찌꺼기만 남을 때까지 자신을 태워버렸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지

그는 굉장한 악취를 남기고 떠나갔다고.'" 조나단 스위프트의 시 'A Satirical Elegy'의 한 대목


클라라가 시를 암송하자 벽난로 주변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의 뒤에서는 여러 대화가 조수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도 들렸다. 아무도 CC 드 푸아티에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지 않았다. 스리 파인스는 그녀의 죽음에 위축되지 않았다. 그녀는 악취를 남기고 떠났지만, 그 악취마저 점점 걷히고 있었다. 스리 파인스는 상실을 경험했음에도 더욱 밝고 생생해졌다.

-p167


비스트로는 살인범을 찾아내는 데 있어 그의 비밀 무기였다. 단지 스리 파인스에서뿐만 아니라 퀘벡의 그 어떤 도시나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우선 안락한 카페나 저렴한 식당, 비스트로 같은 곳을 찾아낸 다음, 살인범을 찾아낸다. 아르망 가마슈는 그의 많은 동료들이 미처 짐작하지도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살인이란 살해된 사람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얽힌, 굉장히 인간적인 일이다. 살인자를 지나치게 흉물스럽고 기괴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그에게 부당한 이득을 안겨주는 것이다. 아니, 살인자는 인간이고, 매 살인의 기저에는 감정이 깔려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비뚤어져 있고 뒤틀리고 추악하기는 하지만 분명 사람의 감정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감정이 지나치게 강대해지면 그 감정을 귀신을 만들어내도록 사람을 몰아붙인다.

가마슈의 일은 증거를 모으는 것이었지만 또한 감정을 모으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엇다.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을 현혹하는 편안한 태도와 현혹될 만큼 편안한 무대이다.

비스트로 같은.

-p257


우린 여기서 죽게 될 거야. 벽이 다가오고 있어. 이 어둡고 좁은 곳에서 꽁꽁 묶여 질식하게 될 거야.

"장 기." 가마슈는 외쳤다. "그만두게."

"그녀는 그럴 가치가 없어요. 제발 가시죠." 그는 소리를 지르며 가마슈의 팔을 잡아끌고 옛 기억의 악몽 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럴 가치가 없어요.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그만두라고 했네." 가마슈가 명령을 내렸다. 그가 이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이는 만큼 몸을 돌리자, 보부아르의 손전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강타해서 눈을 뜨지 못하게 했다. "내 말 들어. 듣고 있나" 그는 짖어댔다. 미친 듯이 그를 잡아당기던 손이 누그러졌다. 이제 계단통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가마슈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손전등 빛을 피해 그 불빛 뒤에 있는 얼굴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지, 장 기?"

보부아르는 환청을 들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 마당에 대장을 시를 인용하려는 건가? 그는 루스 자도의 음울한 시를 들으며 죽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요?"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보게." 대장의 목소리는 고집스러우면서도 한결같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보부아르는 주저하지 않고 생각해냈다. 그다음에 자신의 아내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러나 첫 번째는 아르망 가마슈였다.

"그들을 구하려고 여기 있다고 상상해보게." 이는 제안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보부아르는 가마슈가 불타는 이 집 안에 갇혀 있다고 상상했다. 부상을 입은 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갑자기 이 좁은 계단이 그렇게 좁지 않다고, 겁내고 있는 만큼 어둡지 않다고 느껴졌다.

-p412~413


"내가 조언 한마디 해도 될까?"

그녀는 가마슈가 무슨 말을 할지 어서 듣고 싶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내버려두게. 자네에게는 자네의 인생이 있으니까. 사울 삼촌의 인생도, 부모님의 인생도 아니야." 가마슈의 얼굴은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고, 눈은 무엇을 살피는 듯했다. "과거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고, 지나간 일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어. 사울 삼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 자네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기억이 자네를 죽일 수도 있어, 이베트. 과거는 자네에게 곧장 다가와 자네 멱살을 움켜 쥐고, 있어서는 안 될 곳으로 끌고 갈 수도 있네. 불타는 건물 같은 곳 말이지."

그는 다시 배고픈 듯 혀를 날름거리는 불길을 내다보다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두 사람의 머리가 거의 맞닿을 때까지 몸을 굽혔다. 그녀가 경험해본 가장 친밀한 순간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은 사람은 묻어버리게."

-p419~420


"그 문을 연 후 내 인생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어요. 난 지금 행복해요. 만족하고 있어요. 우습지 않아요? 나는 행복을 찾으러 지옥에 가야만 했어요."

"사람들은 내 직업을 보고 내가 냉소적일 거라 생각하지요." 가마슈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말한, 바로 그걸 이해하지 못해요. 나는 사람이라는 집의 마지막 방을 조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스스로에게도 걸어잠그고 숨기곤 하는 방 말이에요. 그런 방에는 악취가 나도록 썩어가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직업은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을 찾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동기를 알아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의 머리속으로 들어가서 그 마지막 문을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되면..." 그는 커다란 동작을 취하며 팔을 벌렸다. "세상은 갑자기 더욱 아름다워지고, 더욱 생기가 넘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사랑스러워집니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야말로 최선을 알아볼 수 있는 겁니다."

"바로 그거예요."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사람들을 좋아하는군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가마슈는 고백했다.

-p442~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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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역에 있는 제2롯데 갔다가 간단히 수제맥주 한잔하러 들러보았다

생각보다 가게가 작다 

안주는 별로였고

맥주 자체는 맛이 괜찮았다


나는 에일 마셨는데 제법 쌉싸름하고 과일향 진하게 나는 것이 나쁘지 않았음




나의 친절한 유갱이가 내 생각이 나서 사다주었다

사랑해 유갱찡♥


게다가 지난주에 곤트란 갔는데 품절되어서 못 먹어보았던 퀸아망!!!

행복하다


결이 쩔어준다 레알


호우 심장이 바운스바운스


먹어보았다.........

시벌탱 개맛존맛이쟈나요

퀸아망은 미쳤엉!!

곤트란은 미쳤음ㅋㅋㅋ

나 진짜 크로와상이랑 이런 빵 별로 취미없는데ㅋㅋㅋㅋㅋㅋㅋ

취향을 뛰어넘는 맛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발 집 근처로 다가와줘 베이베

서래마을은 너무 멀다예요ㅠㅠ




피터팬

책/읽고나서2015. 3. 16. 10:06



피터팬

저자
제임스 매튜 배리 지음
출판사
웅진씽크빅 | 2008-08-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피터와 웬디』,『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과 함께 프랜시스 돈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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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아동문학으로 분류되는 책들은 자라고 나서 쉽게 다시 읽게는 되지 않는 거 같다. 원래 내가 읽은 책을 다시 잘 읽지 않는 사람이어서일수도 있고. 그래서인지 보통 성인버전의 고전을 읽지 않고서, 속으로 '음, 그 책은 이미 읽은 책이니까' 라고 뒷전으로 미뤄두는 책이 많다.


어쩐지 요즘에 그런 책들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어릴 때 동화책으로 봤거나 청소년 문고(보통 요약 버전이지만 왜곡이 많기도 하다)로 봤던 책들을 다시 원전으로 읽어보기로. 버킷리스트에 넣어둔 책들이 아주 많은데 올해는 이런 책들을 찬찬히 읽어볼 생각이다.


그중에서도 우선순위로 따지면 아주 앞에 있었던 책이 바로 피터 팬이다. 워낙 어릴 때에도 좋아했던 소설이기도 하고, 성인 버전은 어떨지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피터 팬은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영화로도 몇 번 각색되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때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난 영화 후크나 피터 팬은 보지 않았던 거 같고, 대신에 엄마가 한창 조니 뎁을 좋아하던 시절에 피터 팬의 원작자인 제임스 매튜 배리에 대한 일화를 다룬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엄마랑 같이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난다.


결론부터 말하면, 다시 읽은 피터팬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너무나 슬펐다. 원래 이런 류의 소설 너무 좋아해서. 근데 마지막 부분 읽을 때마다 너무 마음 아프고 슬프다. ㅠㅠ 좀 어린 왕자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록 어른의 세계에 완전히 매몰되진 않으려 애쓰더라도 이미 어쩔 수 없이 한 발을 들여놓은 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원작의 피터 팬이라는 캐릭터는 쾌활하고 순수하면서도 한편으로 건방지고 매정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만만하고 오만하며, 이 모든 성격들이 뒤섞인 변덕스러운 캐릭터다. 그런데 이 피터 팬 캐릭터 진짜 너무너무너무 좋다. ㅠㅠ 으으, 매력 터짐..............

후크라는 캐릭터는ㅡ아마 영화에서도 이런 부분을 다루지 않았을까 싶은데ㅡ해적이 되었지만 자신이 사립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고, 잔인하면서도 한편으로 잘못된 품행을 경계하며, 비록 어떤 면에선 우스꽝스럽지만 신사적인 캐릭터라는 것이 매우 이색적이다.

팅커 벨은 비록 작은 요정이지만, 소녀와는 거리가 먼 웬디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운 여성이라는 느낌이다. 피터 팬에 대한 자기 감정을 확실히 알고 있고, 그 때문에 웬디를 질투하기도 하고, 자신을 치장하고 자신의 공간을 꾸미기도 좋아하는 요정으로 등장한다.

웬디는 상대적으로 내 기억과 많이 다르지 않았던 거 같다. 좀 애어른같은 소녀ㅋㅋㅋ 그래서 피터 팬이 오지 않았던 동안에 더 빨리 어른이 되었으려나.


영원히 소년의 모습으로 머무르는 피터 팬은 더 이상 날 수 없는 웬디를 두고 그녀의 딸인 제인과 함께 떠나고, 제인에게 마거릿이라는 딸이 생긴 이후엔 마거릿을 데리고 떠난다. 그렇게 피터 팬의 이야기는 계속되지만, 그게 슬프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피터 팬이 아닌 웬디에 가까운 언젠가는 어른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펭귄클래식의 피터 팬이라는 책에는 우리가 흔히 피터 팬으로 알고 있는 '피터와 웬디'라는 이야기 이외에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이라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이 작품이 좀 더 피터 팬의 원형에 가까운데, 여기에서 피터 팬은 소년이 아닌 아이의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피터 팬 역시도 두번째로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다른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방의 창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로 되돌아가지 못한 아이로 등장한다. 여기에서도 피터는 나중에 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데, 그렇기 때문에 새도 인간도 아닌 얼치기라는 중간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네버랜드라는 공간은 별도로 등장하지 않고, 요정과 피터팬의 세계는 켄싱턴 공원이 닫힌 이후에만 볼 수 있는 숨겨진 세계로 설정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읽은 아이들이 요정들의 세계를 엿보려고 아무도 없는 공원에 남을 걸 염려해서였을까 (피터와 웬디에서도 마찬가지로 웬디는 피터가 요정가루를 뿌려준 이후에만 날 수 있는 걸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설정이 없었으면 많은 영국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ㅋㅋㅋ) 마지막 부분에는 피터 팬이 제 때 구하지 못한 아이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등장하는 묘비는 실제로 지금 켄싱턴 공원에 있고, 사실은 묘비가 아니라 세인트 마리 교구와 패딩턴 교구 사이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석이라고 한다. 다음에 켄싱턴 공원에 가면 찾아보고 싶네.


=


싸움이 계속되는 내내 피터는 어디에 있었을까? 피터는 더 큰 승부를 찾고 있었다. 물론 다른 소년들 역시 용감했으므로 그들이 해적 선장에게서 도망쳤다 해도 나무라서는 안 된다. 후크의 쇠갈고리는 물결 위에 죽음의 원을 그렸고, 그로부터 아이들은 겁먹은 물고기처럼 달아났다.

하지만 후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딱 한 명 있었다. 그는 원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엇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둘이 만난 곳은 물속이 아니었다. 후크는 숨을 고르기 위해 바위로 올라왔고, 때마침 피터 역시 반대편에서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바위는 공처럼 미끄러워서 그들은 바위를 엉금엉금 기어오르다시피 했다. 그들은 상대방이 반대편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고 결국 잡을 것을 찾다가 서로 팔이 스쳤다. 그 바람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그들은 서로 얼굴이 닿을 뻔했다. 둘은 그렇게 해서 만났다.

세상의 위대한 영웅들 중에는, 결투를 하기 바로 직전에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고백한 자들도 있다. 그럼 지금 이 상황에서 피터 역시 그럴까? 난 그렇다고 믿고 싶다. 어쨌든 후크는 시쿡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피터는 의기소침 따윈 몰랐고 즐거움만이 유일한 감정이었다. 기쁨에 찬 그는 가지런한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번개같이 빠른 속도로 후크의 허리띠에서 칼을 낚아채 그를 찌르려 했다. 그런데 순간 피터는 자신이 적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건 정당한 결투가 아니었다. 피터는 올라오라고 후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크가 피터의 손을 깨문 건 그때였다.

피터는 순간 당황했다. 그건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부당함 때문이었다. 피터는 도통 어찌해야 할 바를 졸랐다. 그저 충격을 받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아이들은 처음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 이와 같이 영향을 받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면서 자신들이 공정하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모가 아이에게 부당하게 대하더라도 후에 아이는 부모를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아이는 아닐 것이다. 세상 그 누구도 처음 겪었던 부당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물론 피터는 예외지만. 피터 역시 부당함을 자주 겪었지만 그는 어김없이 그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 생각에 그 점이야말로 피터가 세상 나머지 사람들과 진짜 다른 점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피터는 이번에 당한 부당함 역시 처음 겪는 것과 같았다. 그런 탓에 그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사이 후크의 쇠갈고리 손은 두 번이나 피터를 할퀴었다. 

- p154~155


"안녕, 웬디." 라는 말과 함께, 피터는 웬디를 바위에서 밀어냈다. 날아오른 웬디는 몇 분이 지나자 피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피터는 호수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제 발 디딜 틈도 없이 작아진 바위는 물에 잠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 위에는 엷은 빛줄기가 살며시 드리워졌다. 머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감미롭고 구슬픈 소리가 들려올 터였다. 그건 바로 인어들이 달을 부르는 소리였다.

피터는 보통 소년들과는 좀 달랐다. 하지만 그 역시 결국에는 두려워졌다. 바닷물을 가로질러 떨림이 전해지듯 피터의 몸에도 전율이 흘렀다. 하지만 바다에서는 수백 번이고 떨림이 계속되지만, 피터에게 떨림은 단 한 번뿐이었다. 피터는 다시 바위 위에 우뚝 섰다. 피터의 얼굴에는 예의 그 미소가 가득했고 가슴은 북을 치듯 쿵쿵 뛰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죽는 것도 정말 짜릿한 모험이 될 거야."

-p157~158


그날 밤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크가 처치하고 싶은 건 인디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꿀을 얻기 위해 연기를 피워 쫓아야 할 꿀벌들에 불과했다. 그가 원한 건 팬이었다. 팬과 웬디, 그리고 소년들, 아니 그중에서도 오로지 팬을 원했다.

후크가 한참 어린애인 피터를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로 오른손을 잃었다 해도, 그리고 그날 이후로 자신을 끈덕지게 쫓아다니는 악어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해도, 후크가 그렇게 냉혹하고 잔인한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건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실 피터에게는 이 해적 선장을 미쳐 날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피터의 배짱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외모도 아니고 또... 사실 이리저리 둘러말할 필요는 없다. 우린 그게 뭔지 잘 알고 있으며 이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피터의 건방짐이었다.

- p191


하지만 마지막으론 나온 웬디는 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후크는 웬디에게 모자를 들어 올려 정중히 인사한 뒤, 자신의 팔을 내주며 부하들이 아이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후크의 행동은 놀라우리만치 점잖고 품위가 있었으므로, 웬디는 마음을 뺏긴 나머지 우는 것도 잊었다. 웬디는 영락없는 어린 소녀였다. 

우리는 후크의 행동에 웬디가 황홀해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웬디의 그런 행동으로 결국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웬디가 거만하게 후크의 손을 뿌리쳤다면(그랬다면 우린 통쾌해하면서 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역시나 다른 소년들처럼 공중에 휙 던져졌을 테고, 그러면 후크는 아이들이 묶이고 있는 곳까지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후크가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슬라이틀리의 비밀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 비밀을 몰랐다면 후크는 피터의 목숨을 갖고 비열한 장난을 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 p194~195


후크는 망토를 살며시 땅 위에 벗어놓은 뒤, 사악한 피가 배어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면서 나무 쪽으로 갔다. 그는 담력이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잠시 멈춰 선 뒤 이마에서 촛농처럼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아야 했다. 그러고서 그는 미지의 땅속으로 내려갔다.

무사히 나무줄기 밑까지 도착한 후크는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다시 멈춰 섰다. 그의 눈이 어스레한 불빛에 익숙해지자, 집안의 온갖 살림살이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탐욕스러운 눈길이 유일하게 머문 곳은 그토록 헤맨 끝에 찾게 된 큰 침대였다. 그 침대에는 피터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땅 위에서 어떤 비참한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피터는 아이들이 떠난 후 한동안 유쾌하게 피리를 불었다. 그건 혼자가 되어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어찌 보면 애처로운 노력이었다. 피터는 웬디를 속상하게 하려고 약을 먹지 않기로 했다. 그것도 모자라 웬디를 더욱 괴롭히기 위해 이불도 덮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웬디는 밤이 되면 언제나 추울 거란 생각에 아이들에게 어김없이 이불을 덮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피터는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하지만 우는 대신 웃으면 웬디가 약 올라 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피터는 나보란 듯이 깔깔 웃어대다가 도중에 잠들고 말았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피터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은 다른 소년들의 꿈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피터는 몇 시간이고 서글프게 울부짖으며 꿈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건 피터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감과 연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웬디는 피터를 침대에서 데리고 나와 무릎베개를 해준 다음 자기만의 다정한 방법으로 달래주곤 했다. 그리고 피터가 좀 차분해지면 잠에서 깨기 전에 도로 침대에 눕혔다. 그건 그렇게 보살핌을 받은 걸 알면 피터가 창피해하할까 봐였다. 하지만 이번에 피터는 꿈도 안 꾸고 깊은 잠 속으로 곧장 빠져 들었다. 피터는 한 팔을 침대 밖으로 늘어뜨리고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작은 진주알 같은 이를 드러낸 입가에는 채 가시지 않은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피터는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후크에게 발견되었다. 후크는 조용히 나무줄기 밑에 서서 방안의 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음산한 마음을 움직일 연민의 감정 따윈 전혀 없었을까? 그는 완전히 악마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꽃(그렇다는 애길 들었다.)과 달콤한 음악(그는 하프시코드 연주 솜씨도 상당했다.)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평화로운 광경에 마음이 몹시 어지럽혀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보다 선한 본성에 이끌려 마지못해 나무 위로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가 그를 붙잡았다.

그건 바로 자고 있는 피터의 건방진 모습이었다. 헤벌린 입이며 축 늘어뜨린 팔이며 구부러진 무릎 말이다. 한데 모아서 보면, 그건 바로 건방짐의 결정체였고 그런 눈꼴사나운 모습에 민감한 사람은 다시는 봐선 안 될 광경이었다. 그걸 본 후크의 마음은 차갑게 굳었다. 만약 그가 분노로 폭발해서 백 개의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면, 그 조각 하나하나는 동정따윈 무시하고 곧장 잠자고 있는 피터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등불 하나가 침대를 어스레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후크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살며시 발을 내딛다가 앞을 가로막는 뭔가를 발견했는데, 그건 슬라이틀리의 나무에 달린 문이었다. 문이 나무줄기에 딱 맞지 않았던 터라 후크는 그 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후크는 문손잡이를 더듬어 찾았지만 너무 낮은 곳에 달려 있어서 손이 닿질 않자 불같이 화를 냈다. 온통 혼란스러워진 그의 머릿속에서는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피터의 몸과 얼굴이 더 커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문을 덜걱덜걱 흔들다가 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과연 그의 적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게 뭘까? 핏발 선 그의 눈은 가까운 선반 위에 놓인 피터의 약병을 발견했다.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본 그는 이제 저 소년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 들어왔음을 즉각 깨달았다.

산 채로 잡히지 않으려고, 후크는 언제나 품에 무서운 독약을 지니고 다녔다. 그 약은 독이 있는 나이테들을 모아다가 손수 섞어서 만든 것이었다. 그것들을 한데 넣고 끓여서 노란 액체로 만든 이 약은 과학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독약일 것이다.

후크는 피터의 컵에 이 독약을 다섯 방울 떨어뜨렸다. 그는 부끄럽다기보다는 너무 기뻐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또 그 짓을 하는 동안 그는 잠자는 피터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건 딱한 피터를 보고 맘이 약해질까 봐서가 아니라 단지 독약을 쏟지 않기 위해서였다. 독약을 다 탄 그는 흡족하게 자신의 희생양을 오랫동안 바라본 다음, 뒤돌아서 어렵사리 나무를 꿈틀꿈틀 기어올라 갔다. 나무 꼭대기로 모습을 드러낸 그는 흡사 악의 구멍에서 솟아 나온 악의 화신과도 같았다. 그는 가장 멋진 각도로 모자를 쓰고 망토를 두른 다음 망토의 한쪽 끝을 앞으로 당겨 잡았다. 마치 밤으로부터 가장 어두운 자신의 몸을 감추려는 듯. 그러고는 이상스럽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숲 속을 소리 없이 빠져나갔다.

- p198~200


앙숙인 둘은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후크는 다소 떨고 있었고 피터는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팬." 후크가 끝내 입을 열었다. "이건 다 네가 한 짓이야."

"그래, 제임스 후크." 당돌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건 다 내가 한 짓이지."

"건방지고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후크가 말했다. "지옥에 갈 준비나 하시지."

"어둡고 사악한 인간." 피터가 대꾸했다. "당신을 해치워 주겠어."

더 말할 것도 없이 피터와 후크는 결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양쪽 모두 기세가 팽팽했다. 최고의 칼잡이인 피터는 눈부시도록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가끔 피터는 적의 방어를 비켜서 찌르는 속임수 공격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라 팔이 짧아서 후크를 정통으로 찌르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반면 능수능란함은 절대 뒤지지 않지만 손목 놀림이 잽싸지 못한 후크는 무게감 있는 공격으로 피터를 제압하려 했다. 후크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바비큐에게 배웠던, 자신만의 장기가 된 세게 찌르기로 모든 걸 한 번에 끝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후크의 칼은 자꾸만 빗나갔다. 그래서 그는 거리를 좁혀 와, 지금까지 계속 허공만 긁어대던 자신의 쇠갈고리 손으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피터는 쇠갈고리 손 밑으로 몸을 웅크리면서 그의 갈비뼈를 있는 힘껏 찔렀다. 후크는 색깔이 이상한 자신의 피를 보고 놀란 나머지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후크는 결국 피터의 손아귀에 놓인 것이다.

"이때다!" 소년들이 일제히 입을 모았다. 그러나 피터는 품위 있는 몸짓으로 적에게 다시 칼을 집어 들 것을 청했다. 후크는 잽싸게 칼을 집어 들었지만, 피터가 올바른 품행을 보였다는 사실에 비참해졌다.

지금까지 후크는 자신의 적을 그저 지독한 악마 녀석쯤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문득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팬, 넌 도대체 누구며 무엇이냐?" 후크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난 젊음이자 기쁨이지." 피터는 생각나는 대로 대충 대답했다. "난 알에서 깨어난 작은 새야."

당연히 피터의 말은 순 엉터리였다. 그러나 비참한 후크에게 그 말은 피터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게다가 그건 올바른 품행의 절정 그 자체였다. 

"다시 붙어." 후크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후크는 인간 도리깨가 되어 싸우기 시작했다. 그 앞을 가로막는 자는 후크가 휙휙 휘두르는 칼에 애 어른 할 것 없이 죄다 두 동강 날 것 같았다. 그렇지만 피터는 후크가 일으키는 칼 바람에 떠밀려 그의 위험한 손아귀에서 벗어나듯 후크의 주위를 훨훨 날아다녔다. 피터는 자꾸만 화살처럼 달려들어 후크를 찔렀다.

이제 후크는 아무런 희망 없이 싸우고 있었다. 그토록 열정에 타오르던 가슴은 더 이상 목숨을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단 하나 간절한 바람이 있엇다. 그건 가슴이 채 식기 전에, 피터가 잘못된 품행을 저지르는 걸 보는 것이었다. 

싸우다가 갑자기 후크는 화약고로 달려가 그곳에 불을 붙였다.

"이제 이 분 안에 배는 폭발해서 산산조각이 날 거야." 후크가 외쳤다.

지금이야, 지금. 후크는 생각했다. 이제 그놈의 본색이 드러날 거야.

그러나 피터는 화약고에서 포탄을 들고 나와 그걸 조용히 배 밖으로 던질 뿐이었다.

후크는 도대체 어떤 품행을 보인 것일까? 잘못된 길로 들어선 그였지만, 우린 그를 동정하는 대신 그가 결국 자신이 속해있던 집단의 전통에 충실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소년들은 조롱 섞인 야유를 퍼부으며 후크의 주위를 날고 있었다. 그리고 후크는 갑판 위를 비틀거리며 그들을 향해 무기력하게 칼을 찔러댔다. 그러나 후크의 마음은 이미 이들을 떠나 있었다. 그는 오래전 운동장에서 수그려 걷던 일과 착한 일을 해서 교장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던 일과 담벼락 위에 앉아서 축구를 관람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신발은 옳았고 그의 양복 조끼도 옳았고 타이 역시 옳았고 양말 역시 옳았다.

아주 비겁하지만은 않았던 제임스 후크, 이제 그와 작별할 시간이 왔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단검을 치켜들고 유유히 날아오는 피터를 보자 후크는 바다에 몸을 던지기 위해 뱃전 울타리 위로 뛰어올랐다. 후크는 악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랐다. 우리가 일부러 악어 배 속의 시게를 멈추어놓아서 그가 이 사실을 모르게 했기 때문이다. 이건 마지막으로 후크의 체면을 조금이나마 지켜주기 위한 우리의 배려다.

그래도 후크는 최후의 순간에 하나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물론 우리가 그리 부러워할 일은 아니지만. 후크는 뱃전 울타리 위에 선 채, 바람을 가르며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피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후크는 피터에게 발을 쓰라는 신호를 보냈다. 결국 피터는 후크를 칼로 찌르는 대신 발로 차버렸다.

마침내 후크는 그토록 원하던 소원을 푼 것이다.

"잘못된 품행." 후크는 비아냥거리듯 외치더니 만족해하며 악어에게로 떨어졌다.

그렇게 제임스 후크는 죽어버렸다.

- p227~231


"모두 침대에 누워서 엄마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자. 우리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야."

이윽고 달링 부인은 남편이 잠들었는지 보기 위해 아이들 침실로 들어왔다. 침대는 모두 차 있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기뻐서 소리 지르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인은 아이들을 봤지만 진짜라고 믿지는 않았다. 알다시피 부인은 아이들이 침대에 누워 있는 꿈을 하도 자주 꿨던 터라, 그 광경 역시 아직까지 머물고 있는 꿈이라 생각했다.

부인은 난로 옆 의자에 앉았다. 그곳은 오래전에 부인이 아이들을 돌보던 곳이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왜 모르는 척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엄마!" 웬디가 소리쳤다.

"웬디구나!" 부인은 대답하면서도 이게 꿈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존이구나!" 부인이 말했다.

"엄마!" 마이클이 이제야 엄마를 알아보며 외쳤다.

"마이클이구나." 그러면서 부인은 다시는 품에 안지 못할 이기적인 세 악동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이들이 정말로 품에 들어온 것이다. 침대를 빠져나와 달려온 웬디, 존, 마이클이 정말로 부인의 품에 안긴 것이다.

"조지, 조지!" 이제야 말문이 열린 부인이 소리쳤다. 잠에서 깨어난 달링 씨는 이 놀라운 축복의 시간을 함께했고 나나도 급히 달려왔다. 세상에 그보다 더 감격스러운 순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문으로 방안을 지켜본 작은 소년 외에는. 피터는 그동안 다른 소년들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황홀한 기쁨들을 많이 느껴봤다. 그러나 창문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그 행복한 광경은 피터 자신은 영원히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 p243~244


한편 피터는 날아가기 전에 웬디를 한 번 더 만났다. 물론 피터가 직접 창문까지 간 건 아니고 도중에 그곳을 지나친 것이었다. 피터를 본 웬디는 창문을 열었다.

"여어이, 웬디, 잘 있어." 피터가 말했다.

"이런, 너 가는 거야?"

"응."

"피터, 우리 부모님한테 뭔가 좋은 말을 해드리고 싶지 않니?" 웬디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니."

"나에 대해선, 피터?"

"싫어."

그때 바짝 긴장하고 웬디를 지켜보던 달링 부인이 창가로 다가왔다. 부인은 다른 소년들을 모두 입양했으니 피터 역시 입양하고 싶다고 말했다.

"절 학교에 보내실 건가요?" 피터가 간사하게 물었다.

"그럼."

"회사에도요?"

"아마도."

"제가 곧 어른이 되나요?"

"눈 깜짝할 새에 그렇게 되지."

"전 학교에 가서 심각한 것 따윈 배우고 싶지 않아요." 피터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전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깼는데 수염이 나 있으면 어떡해요!"

"피터." 웬디가 달래듯 말했다. "네가 수염이 나도 난 널 좋아할 거야." 달링 부인은 피터를 향해 두 팔을 벌렸지만 피터는 그걸 뿌리쳤다.

"다가오지 말아요, 부인. 아무도 날 잡아서 어른으로 만들지 못해요."

"하지만 넌 어디서 살 거니?"

"웬디를 위해 지은 집에서 팅크랑 살 거예요. 요정들이 자기네가 잠자는 나무 꼭대기에다 집을 올려줄 거예요."

"아, 정말 멋져." 웬디가 너무 황홀해하며 말하는 바람에 달링 부인은 딸을 꼭 붙잡았다.

"난 요정들이 다 죽은 줄 알았는데." 달링 부인이 말했다.

"어린 요정들은 언제나 많아요." 요정이라면 이제 훤히 꿰고 있는 웬디가 설명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웃으면 요정이 태어나요. 그러니까 새로운 아기들이 계속 태어나는 한, 새로운 요정들도 언제나 태어나지요. 요정들은 나무 꼭대기 둥지에 살아요. 그리고 자주색 요정은 남자 애, 흰색 요정은 여자 애고, 파란색 요정은 자신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멍청한 아기들이에요."

"난 그렇게 재밌게 살 거야." 피터가 한쪽 눈으로 슬쩍 웬디를 쳐다보며 말했다.

- p247~248


놀림을 받긴 했지만 마이클은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걸 다른 소년들보다 오래 믿었다. 그래서 첫 번째 해가 끝나 갈 무렵 피터가 웬디를 데리러 왔을 때, 마이클 역시 그들을 따라 네버랜드로 갔다. 웬디는 옛날에 그곳에서 나뭇잎과 열매로 만든 원피스를 입고 피터와 함께 날아갔다. 단 한 가지, 웬디는 피터가 자신의 작아진 옷을 볼까 봐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피터는 자기 이야기만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걸 눈치 채지 못했다.

웬디는 피터와 엣날 일들을 신 나게 이야기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피터의 머릿속에는 옛날 모험을 밀어내고 새로운 모험들이 가득 차 있었다.

"후크 선장이 누구야?" 웬디가 그 무시무시한 적에 대해 이야기하자 피터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네가 후크를 죽이고 우리 모두를 구해 준 것 생각 안 나?" 웬디가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난 누군가를 죽이고 나면 다 잊어버려." 피터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웬디가 팅커 벨이 자길 보고 반가워했으면 좋겠다고 주저하며 말하자 피터는 이렇게 말했다. "팅커 벨이 누군데?"

"오, 피터!" 경악을 한 웬디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웬디가 설명을 해줘도 피터는 팅커 벨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요정은 수도 없이 많아." 피터가 말했다. "팅커 벨은 아마 죽었을 것 같은데."

아마도 피터의 말이 옳을 것이다. 요정들은 그리 오래 살지 못하니까. 그럼에도, 요정들은 하도 작아서 잛은 시간이라도 꽤 길게 느껴질 것이다.

피터에겐 지난 한 해가 마치 어제와 같다는 걸 알게 된 웬디는 마음이 아팠다. 그와 달리 웬디에게 지난 한 해의 기다림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피터는 변함없이 매력이 넘쳤고, 그들은 나무 꼭대기에 있는 작은 집에서 성공적으로 봄맞이 대청소를 했다.

다음 해에 피터는 오지 않았다. 웬디는 원피스가 작아져서 새 원피스를 입고 기다렸지만 피터는 오지 않았다.

"피터가 아픈가 봐." 마이클이 말했다.

"피터는 절대로 아프지 않는 거 알잖아."

마이클은 웬디에게 다가와 몸을 떨면서 속삭였다. "아마 피터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 웬디 누나!" 마이클이 울지 않았더라면 웬디가 그 말에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피터는 다음번 봄맞이 대청소 때 왔다. 이상하게도 피터는 자기가 한 해를 건너뛰고 온 걸 전혀 몰랐다.

그때가 소녀 웬디가 피터를 본 마지막이었다. 웬디는 좀 더 오랫동안 피터를 위해 성장통을 겪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상식 대회에서 상을 타자 웬디는 자신이 피터에게 솔직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무심한 소년 피터는 오지 않았다. 그러다 둘이 다시 만났을 때, 웬디는 결혼을 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웬디에게 피터는 추억의 장난감 상자에 내려앉은 작은 먼지에 불과했다. 웬디는 자라서 어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웬디를 딱히 여길 필요는 없다. 웬디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부류 중 하나였으니까. 웬디는 자신의 의지로, 다른 소녀들보다 하루빨리 어른이 된 터였다.

- p251~252


제인은 엄마와 함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서 텐트를 만든 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지금 뭐가 보여요?"

"오늘 밤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웬디가 대답했다. 지금 나나가 있었더라면 대화를 곧장 중단시켰을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아니에요, 엄마는 보고 있어요." 제인이 말했다. "엄마가 어린 소녀였을 때를 보고 있어요."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란다, 애야." 웬디가 말했다. "아아, 세월 한번 빠르게 지나갔구나!"

"세월은 엄마가 어렸을 때 날았던 것처럼 빨리 지나갔나요?" 아이가 영악하게 물었다.

"내가 날았던 것처럼! 제인, 그거 아니? 엄마는 가끔 내가 정말 날긴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단다."

"맞아요. 엄마는 날았어요."

"그렇게 날았던 옛날이 좋았더랫지!"

"그런데 엄만 왜 지금은 날지 못해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란다,얘야.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나는 법을 잊는단다."

"왜 그러는데요?"

"어른들은 더 이상 쾌활하지도 순수하지도 매정하지도 않으니까. 오직 쾌활하고 순수하고 매정한 사람만이 날 수 있단다."

- p253~254


어느 날 밤 비극이 찾아왔다. 때는 봄이었다. 제인은 엄마의 이야기까지 모두 듣고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웬디는 방에 다른 불빛이 없었던 터라 난롯가 가까이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닥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사이, 웬디는 꼬끼오 소리를 들었다. 그러더니 옛날처럼 창문이 스르륵 열리고 피터가 방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피터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고, 웬디는 그가 아직도 젖니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피터는 어린 소년이었고 웬디는 다 자란 어른이었다. 웬디는 난롯가에서 감히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웅크리고 있었다. 몸둘 바를 모르며 죄책감을 느끼는, 다 자란 여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안녕, 웬디." 피터는 뭐가 달라졌는지 눈치도 못 채고 인사를 건넸다. 피터는 순전히 자기 생각만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 웬디의 흰 드레스는 웬디가 피터를 처음 보았을 때 입고 있던 잠옷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안녕, 피터." 웬디가 되도록 몸을 작게 웅크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웬디 안에 있는 무언가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여자, 여자, 내게서 좀 사라져버려."

"어이, 존은 어딨어?" 침대 하나가 안 보이자 피터가 물었다.

"존은 이제 여기 없어." 웬디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마이클은 자는 거야?" 피터가 제인을 대충 쳐다보며 물었다.

"응." 웬디는 대답했다. 그러나 자신이 피터는 물론 제인에게도 솔직하지 못하다는 걸 느꼈다.

"걘 마이클이 아냐." 웬디가 재빠르게 고쳐 말했다.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막기 위해.

피터는 쳐다보았다. "어라, 그럼 새로운 아이야?"

"응."

"남자 애야, 여자 애야?"

"여자 애."

이제는 피터도 상황을 이해하겠지.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피터." 웬디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넌 나와 함께 날아가길 원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 그러면서 피터는 다소 굳은 표정을 덧붙였다. "지금이 봄맞이 대청소 때라는 걸 잊은 거야?"

웬디는 피터가 수도 없이 봄맞이 대청소 때를 잊었다는 걸 말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난 갈 수 없어." 웬디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난 나는 법을 잊어버렸어."

"내가 금세 가르쳐줄게."

"오, 피터, 쓸데없이 요정가루를 나한테 뿌리지 마."

웬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터는 끝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된 거야?" 피터가 움츠러들며 소리쳤다.

"이제 불을 켤 거야." 웬디가 말했다. "그래야 네가 날 똑똑히 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아는 한, 태어나서 처음으로 피터는 공포에 질렸다.

"제발 불 켜지 마." 피터가 소리쳤다.

웬디는 비참해진 소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웬디는 이제 피터 때문에 상처받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미소를 짓는 다 자란 여인이었다. 물론 그 미소는 젖어 있었지만.

웬디는 결국 불을 켰고 피터는 웬디를 똑똑히 보았다. 피터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인이 자기를 팔로 안아 올리려 하자 피터는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피터가 또 물었다.

웬디는 피터에게 사실을 말해야 했다.

"난 어른이 되었어, 피터. 난 스무 살 하고도 한참 더 되었는걸. 난 오래전에 어른이 되었어."

"안 그런다고 약속했잖아!"

"어쩔 수 없었어. 난 결혼도 했어, 피터."

"아니야, 아니야."

"맞아. 저기 침대에서 자고 있는 여자 애가 내 딸이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하지만 피터는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피터는 잠자고 있는 아이를 향해 주먹을 치켜들고 한 발짝 다가갔다. 물론 제인을 때리지는 않았다. 피터는 바닥에 앉아 엉엉 울었고, 웬디는 그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애를 먹었다. 옛날에는 그렇게도 솜씨 좋게 피터를 달랬건만. 이제 다 자란 여인에 불과한 웬디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방을 뛰쳐나갔다.

- p256~259


이 시기에 배리가 가장 인상적이고 주목할 만한 사회적 관계를 맺은 건 어른들이 아닌 켄싱턴 공원의 어린 소년들 셋이었다. 배리와 그의 아내는 켄싱턴 공원 근처의 렌스터 코너에 있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배리는 자신이 기르던 커다란 세이트버나드종의 개 포르토스를 데리고 켄싱턴 공원을 자주 산책했다. 1897년 여름에 배리는 공원에서 루엘린 데이비스 형제들과 산책을 하고 있는 보모 메리 호지슨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형제들은 네 살인 조지와 각각 세 살과 한 살인 잭과 피터였다. 이 소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배리는 마술을 보여 주며 그들과 놀아주기 시작했다. 그는 여름과 가을이 지나도록 이 소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틈날 때마다 요정, 해적, 마법의 섬, 이상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만찬 파티에서 배리는 소년들의 어머니인 실비아 루엘린 데이비스를 만났다. 그녀는 소설가 조르주 뒤 모리에의 딸이자, 배우인 제럴드 뒤 모리에(후에 후크 선장의 역할을 유명하게 만들었다.)의 누나였다. 당시 서른한 살이었던 아름답고 상냥한 젊은 여인 실비아 데이비스에게는 아서라고 하는 서른네 살의 유능한 변호사 남편이 있었다. 배리는 실비아가 자신이 켄싱턴 공원에서 만났던 데이비스 형제들의 어머니인 것을 알자마자 그녀에게 강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배리가 실비아를 이상적인 여인이자 어머니로서 사랑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배리가 실비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평생토록 받아들이고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이다.

배리와 데이비스 가족(후에 마이클(1900)과 니콜라스(니코)(1903), 두 명의 아들이 더 태어났다.) 사이의 관계를 침입적이고 침투적이며 조작적이고 강박적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사실 배리는 자신의 허구 작품을 조작하듯 그들의 삶을 취해서 '조작'했으며, 자신의 상상력과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변경하고 수정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배리가 괴물이나 독재자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니며, 그가 자신이 얼마나 침입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완전히 알고 있었다는 것도 아니다. 배리는 무척 충실하고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친한 친구들, 특히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충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강박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친절을 베풀 때면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사실, 아서 데이비스와 그의 어린 아들 가운데 하나인 피터는 배리가 식구들에게 관여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리는 한번 관계를 맺으면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실비아를 만난 후, 1898년이 되자 배리는 더 이상 소년들을 켄싱턴 공원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제 배리는 그들의 집을 방문해서 차를 마시거나 저녁 식사를 하기도 했다. 요정들에 관한 그의 이야기는 갈수록 발전했고, 그는 데이비스 형제 중 셋째인 피터의 이름과, 자유분방하고 흥청대는 행동으로 널리 알려진 목양의 신 팬의 이름을 결합하여 '피터 팬'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냈다. 물론 배리의 팬은 이 아르카디아의 신처럼 남성답고 방탕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와 달리 배리의 팬은 엄마로부터 쫓겨난 어린 소년이었으며, 날 수 있고 켄싱턴 공원의 요정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를 벗어나면 그는 힘을 잃었다.

- p19~20, 서문 중에서


아서 코난 도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토마스 하디, H. G.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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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근방에 있다는 원더브레드

부모님이 교회갔다가 매일 여기서 치즈 들어간 베이글을 사오시는데 그게 그렇게 존맛이다

그래서 올려봄


이런 스탬프 찍힌 빵봉지 좋아

버릴 때도 부담없고...


크랜베리 베이글

굉장히 보근보근하고 부들부들한 식감이라 너무 맛있다


치즈가 엄청 많이 들어가 있어서 비죽비죽 튀어나와있음

존맛


검색해보니 가성비 참 좋다는데 가격은 잘 모르겠다

내가 안 사와서...






15소년표류기(1)

저자
쥘 베른 지음
출판사
열림원(도) | 2003-01-1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H.G 웰즈 등과 더불어 초기 SF의 위대한 선구자로 꼽히는 쥘...
가격비교



15소년 표류기 2 (쥘베른 콜렉션 3)

저자
쥘 베른 지음
출판사
열림원 | 2003-01-1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H.G 웰즈 등과 더불어 초기 SF의 위대한 선구자로 꼽히는 쥘...
가격비교


요즘 아동문학이라고 해야 하나. 청소년 소설들이 읽고 싶어져서 다시 빌려봤다. 근데 나 이거 중고등학생 때 안 읽었었나 보다. 줄거리가 거의 기억에 없더라. 제목만 들었던 책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ㅠㅠ


여하간에 다시 읽은 15소년 표류기는 정말 재밌었다. 너무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려나간다는 느낌이 있어 현실감은 그닥 없긴 한데; 당시 모험소설의 전형 정도로 생각하면, 뭐. 그런데 쥘 베른의 질서지향 약간 강박적일 정도ㅋㅋㅋ 애들이 표류하다 무인도에 도착해서 사회를 구성하더니, 상급생이 하급생 애들 교육도 시키고, 대다나다... 브리앙과 도니펀의 갈등이 극복되는 과정도 그렇고, 뭔가 소설 전체적으로 너무 바람직해.


다 읽고 나니 이 소설의 대척점에 있는 파리대왕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파리대왕은 분명히 대학교 다닐 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당시에 읽고 나서 굉장히 찜찜하고 끔찍했던 기억이 나서 손이 가지 않았던 소설 중 하난데, 이제는 다시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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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역 근처에 있는 아이스크림집 펠앤콜

블루리본에도 2년째 등록


짙은 청색 외관이 예쁘다


여기 아이스크림 라인업은 그때그때 바뀌는 거 같다

이날은 화이트데이라 나름 그 때 한정이라는 순애보가 있었음


음 저 벽에 걸린 액자는 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샀던 그 엽서 그림이군...

모마샵에서 샀었는데


실내 좌석이 많진 않은데 다들 간단히 아이스크림만 먹고 나가는 분위기라 보통 자리는 항상 있었다


안쪽 자리도 귀엽다



다 독특하니 달지 않고 맛있었다

가격대는 좀 있는데 깔끔하니 맛있음




이동진을 내세우고 있는 빨간책방

위즈덤하우스의 북카페인데 그건 묻히고...

전지역 베이커리의 셀렉트샵같은 자도 랭킹이랑 왠지 이동진만 남은 거 같은



여하간 빵덕후들에게도 좋은 곳이다


카운터에 보니 로네펠트로 밀크티를 만든다기에 궁금해서 주문해보았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오 생각보다 굉장히 훌륭하다! 진하고 홍차향이 물씬나는... 정말 맛있었다

개인적으로 클로리스 밀크티보다도 훨 취향이었던



딸기타르트는 맛있었지만 좀 가성비가 아쉬웠던


이날따라 오페트 당근케익이 왤케 맛있던지


흡입을 하였소

개맛존맛!




임선생님 추천으로 가게 된 솔내한옥집

홍대 한구석에 이런 한식집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작은 골목에 들어가면 이렇게 작은 한옥집 문이 있음



안에도 깔끔하다


반찬도 정갈하니 간이 슴슴해서 좋다



내가 시킨 보리밥


배추랑 고추는 쌈장에 슥슥


두부가 맛있게 나왔길래 찍어봄ㅎ


보리밥정식 풀샷!


요렇게 나온 걸


밥 위에 얹고 슥슥


너무나 맛있었던 녹두지짐이랑


속이 튼실하고 보근보근하다

배추전


배추전 처음인데 호우 정말 맛있었다

존맛...

집에서 어떻게 하면 이런 맛이 날 수 있지


반찬도 다 정갈하고 너무 맛있게 잘먹었음

홍대 근처에서 한식 먹을 일 있을 때 또 갈듯

외국 친구들 데려와도 좋을 거 같다

간이 맵거나 그렇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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