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의 세라 워터스 새 책. 개인적으로 핑거스미스 > 벨벳 애무하기 > 끌림 이었는데, 이 순서로 읽어서 어째 점차 감흥이 줄어드는 기분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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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덜미에 구불거리는 흐릿한 금발 몇 가닥이 보였다. 내 생각에, 도스의 머리 색은 헬런보다 더 금빛이며, 제대로 감고 다듬으면 무척이나 아름다울 것 같다. 햇빛 조각이 다시 밝아졌지만, 피곤에 지치고 추워하는 이가 잠을 자는 동안 이불이 슬금슬금 흘러내리듯이, 해는 무자비한 행로를 쉬지 않고 야금야금 나아갔다. 도스는 다시금 얼굴로 온기를 느끼며 햇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말했다. "잠시 저와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한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도스는 네모난 모양 햇빛이 사라질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무 말 없이 잠시 나를 살펴 보더니 자신을 위로를 받기 위해 내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자신은 이미 이곳에서 <위로를 받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내가 나에 대해 자기에게 말하지 않는데 왜 자신이 내게 뭔가 말을 해야 하냐고 물었다.
도스는 강단 있게 말하려 애썼지만 그리 성공하지 못했으며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무례한 게 아니라 허세처럼 보였고 그런 모습 뒤에는 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상냥하게 대한다면 그녀는 울음을 터뜨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핵스비 양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여러 가지 주제들이 있지만, 내가 알기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금지되지 않았어요. 원한다면 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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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도스가 나를 보고 있으니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윽고 도스가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가 밀뱅크에 온 건 당신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놓인 여자들을 만나면 기분이 예전처럼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지요." 나는 도스가 말한 단어 하나하나를 똑똑히 기억한다. 너무나 끔찍하면서도 너무나도 진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계속 말했다. "자, 저를 살펴보세요. 저는 충분히 비참하니까요. 온 세상이 저를 살펴보아도 괜찮답니다. 그게 제가 받은 형벌의 일부니까요." 그리고 도스는 다시 도도한 자세를 취했다. 나는 내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그녀가 형벌을 더 가혹하게 느끼도록 하려고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했다. 그러자 도스는ㅡ앞서 그러했듯이ㅡ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신은 내 위로가 필요 없다고 했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 자신을 위로해 줄 친구들이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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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가 가느다란 두 손을 모으고 거칠고 붉어진 마디를 천천히 쓰다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녀를 지지해 줄 친구가 없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치켰다. 도스는 자신에게는 아주 많은 친구들이 있었으며 자신을 <희생양>이라고 불렀지만, 단지 처음에만 그랬을 뿐이라고 했다. 그녀는 <심지어 영계를 다루는 사람>들 속에서도 질투심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자신이 추락하는 걸 아주 즐거워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은 그냥 겁을 먹었단다. 결국 도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녀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을 마친 그녀는 무척이나 비참해 보였으며, 굉장히 예민하고 어려 보였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도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영혼이라고 주장하나요?" 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나는 빙긋 웃은 듯하다. 내가 말했다. "정작 당사자인 유령은 자유로이 돌아디는데 당신은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다니, 정말 불공평해요."
그녀는 "어머, <피터 퀵>이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녀는 내 뒤편, 젤프 부인이 잠가 둔 철창문을 바라보았다. "영혼도 그 세계에서 나름대로 벌을 받는 답니다. 피터는 이곳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곳에 있어요. 저와 마찬가지로 형기가 끝나고 풀려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도스가 서서 내 질문에 으스스하면서도 성실한 자세로 나름의 정교한 논리를 세워 조목조목 대답하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지금 이렇게 적고 있으니 더욱 이상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도스가 <피터> 또는 <피터 퀵>에 대해 무람없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다시 살짝 웃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며 다소 가까이 있었다. 이제 나는 도스에게서 살짝 물러섰고, 그 모습을 본 그녀는 뭔가를 알아차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말했다. "아가씨는 제가 바보거나 배우라고 생각하는군요. 그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제가 연기를 하는 거라고..." "아니에요!" 내가 즉시 대답했다. "아니에요. 당신이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녀와 이야기를 할 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단지 아주 다른 일들, 평범한 일들을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정신이 <경이로움의 한계에 아주 무지한>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제 도스는 싱긋 웃었지만, 아주 희미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경이로움을 너무 많이 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이란 게 여기에 이렇게 갇혀 있는 거죠..."
그렇게 말하며 도스는 살짝 손짓을 해보였다. 그 동작은 무미건조하고 고달픈 감옥 전체를,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받는 자신을 설명하는 듯했다.
"여기 있는 게 굉장히 끔찍하겠지요." 잠시 뒤 내가 말했다.
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스가 말했다. "아가씨는 강신술이 상상이라고 생각하실 거에요. 하지만 여기가 밀뱅크인 까닭에, 이곳에 와 있는 지금은 모든 것이 진실인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나는 아무 장식도 없는 흰 벽을, 개켜 둔 해먹을,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더러운 상자를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노라고 말했다. 감옥이 힘든 곳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강신술에 더 큰 진실을 부여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적어도 감옥은 내가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곳이지만, 그녀의 영혼들은, 진짜로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했다. 나는 영혼과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또한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도스는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하면 된다고 했다. 영혼에게 말을 하면 <영혼에게 힘>을 주기 때문이란다. 또한 영혼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좋단다. "그러면 영혼들이 당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답니다, 프라이어 양."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저에 대해서요? 하지만 영혼들에게 화젯거리가 마거릿 프라이어밖에 없다면 그날 천국은 아주 조용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그녀에게는 분위기를 바꾸고, 음색을 바꾸고, 자세를 바꾸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 전부터 그것을 알아차렸다. 도스는 그런 행동을 아주 미묘하게 햇다. 하지만 사람 많고 어두운 극장 저편 무대에서 배우가 하는 그런 방식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마치 아주 살짝 다른 조표에 따라 음이 오르고 내리는 조용한 음악처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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