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 'ㅅ'

피터팬

책/읽고나서2015. 3. 16. 10:06



피터팬

저자
제임스 매튜 배리 지음
출판사
웅진씽크빅 | 2008-08-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피터와 웬디』,『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과 함께 프랜시스 돈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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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아동문학으로 분류되는 책들은 자라고 나서 쉽게 다시 읽게는 되지 않는 거 같다. 원래 내가 읽은 책을 다시 잘 읽지 않는 사람이어서일수도 있고. 그래서인지 보통 성인버전의 고전을 읽지 않고서, 속으로 '음, 그 책은 이미 읽은 책이니까' 라고 뒷전으로 미뤄두는 책이 많다.


어쩐지 요즘에 그런 책들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어릴 때 동화책으로 봤거나 청소년 문고(보통 요약 버전이지만 왜곡이 많기도 하다)로 봤던 책들을 다시 원전으로 읽어보기로. 버킷리스트에 넣어둔 책들이 아주 많은데 올해는 이런 책들을 찬찬히 읽어볼 생각이다.


그중에서도 우선순위로 따지면 아주 앞에 있었던 책이 바로 피터 팬이다. 워낙 어릴 때에도 좋아했던 소설이기도 하고, 성인 버전은 어떨지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피터 팬은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영화로도 몇 번 각색되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때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난 영화 후크나 피터 팬은 보지 않았던 거 같고, 대신에 엄마가 한창 조니 뎁을 좋아하던 시절에 피터 팬의 원작자인 제임스 매튜 배리에 대한 일화를 다룬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엄마랑 같이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난다.


결론부터 말하면, 다시 읽은 피터팬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너무나 슬펐다. 원래 이런 류의 소설 너무 좋아해서. 근데 마지막 부분 읽을 때마다 너무 마음 아프고 슬프다. ㅠㅠ 좀 어린 왕자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록 어른의 세계에 완전히 매몰되진 않으려 애쓰더라도 이미 어쩔 수 없이 한 발을 들여놓은 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원작의 피터 팬이라는 캐릭터는 쾌활하고 순수하면서도 한편으로 건방지고 매정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만만하고 오만하며, 이 모든 성격들이 뒤섞인 변덕스러운 캐릭터다. 그런데 이 피터 팬 캐릭터 진짜 너무너무너무 좋다. ㅠㅠ 으으, 매력 터짐..............

후크라는 캐릭터는ㅡ아마 영화에서도 이런 부분을 다루지 않았을까 싶은데ㅡ해적이 되었지만 자신이 사립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고, 잔인하면서도 한편으로 잘못된 품행을 경계하며, 비록 어떤 면에선 우스꽝스럽지만 신사적인 캐릭터라는 것이 매우 이색적이다.

팅커 벨은 비록 작은 요정이지만, 소녀와는 거리가 먼 웬디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운 여성이라는 느낌이다. 피터 팬에 대한 자기 감정을 확실히 알고 있고, 그 때문에 웬디를 질투하기도 하고, 자신을 치장하고 자신의 공간을 꾸미기도 좋아하는 요정으로 등장한다.

웬디는 상대적으로 내 기억과 많이 다르지 않았던 거 같다. 좀 애어른같은 소녀ㅋㅋㅋ 그래서 피터 팬이 오지 않았던 동안에 더 빨리 어른이 되었으려나.


영원히 소년의 모습으로 머무르는 피터 팬은 더 이상 날 수 없는 웬디를 두고 그녀의 딸인 제인과 함께 떠나고, 제인에게 마거릿이라는 딸이 생긴 이후엔 마거릿을 데리고 떠난다. 그렇게 피터 팬의 이야기는 계속되지만, 그게 슬프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피터 팬이 아닌 웬디에 가까운 언젠가는 어른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펭귄클래식의 피터 팬이라는 책에는 우리가 흔히 피터 팬으로 알고 있는 '피터와 웬디'라는 이야기 이외에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이라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이 작품이 좀 더 피터 팬의 원형에 가까운데, 여기에서 피터 팬은 소년이 아닌 아이의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피터 팬 역시도 두번째로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다른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방의 창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로 되돌아가지 못한 아이로 등장한다. 여기에서도 피터는 나중에 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데, 그렇기 때문에 새도 인간도 아닌 얼치기라는 중간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네버랜드라는 공간은 별도로 등장하지 않고, 요정과 피터팬의 세계는 켄싱턴 공원이 닫힌 이후에만 볼 수 있는 숨겨진 세계로 설정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읽은 아이들이 요정들의 세계를 엿보려고 아무도 없는 공원에 남을 걸 염려해서였을까 (피터와 웬디에서도 마찬가지로 웬디는 피터가 요정가루를 뿌려준 이후에만 날 수 있는 걸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설정이 없었으면 많은 영국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ㅋㅋㅋ) 마지막 부분에는 피터 팬이 제 때 구하지 못한 아이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등장하는 묘비는 실제로 지금 켄싱턴 공원에 있고, 사실은 묘비가 아니라 세인트 마리 교구와 패딩턴 교구 사이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석이라고 한다. 다음에 켄싱턴 공원에 가면 찾아보고 싶네.


=


싸움이 계속되는 내내 피터는 어디에 있었을까? 피터는 더 큰 승부를 찾고 있었다. 물론 다른 소년들 역시 용감했으므로 그들이 해적 선장에게서 도망쳤다 해도 나무라서는 안 된다. 후크의 쇠갈고리는 물결 위에 죽음의 원을 그렸고, 그로부터 아이들은 겁먹은 물고기처럼 달아났다.

하지만 후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딱 한 명 있었다. 그는 원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엇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둘이 만난 곳은 물속이 아니었다. 후크는 숨을 고르기 위해 바위로 올라왔고, 때마침 피터 역시 반대편에서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바위는 공처럼 미끄러워서 그들은 바위를 엉금엉금 기어오르다시피 했다. 그들은 상대방이 반대편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고 결국 잡을 것을 찾다가 서로 팔이 스쳤다. 그 바람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그들은 서로 얼굴이 닿을 뻔했다. 둘은 그렇게 해서 만났다.

세상의 위대한 영웅들 중에는, 결투를 하기 바로 직전에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고백한 자들도 있다. 그럼 지금 이 상황에서 피터 역시 그럴까? 난 그렇다고 믿고 싶다. 어쨌든 후크는 시쿡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피터는 의기소침 따윈 몰랐고 즐거움만이 유일한 감정이었다. 기쁨에 찬 그는 가지런한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번개같이 빠른 속도로 후크의 허리띠에서 칼을 낚아채 그를 찌르려 했다. 그런데 순간 피터는 자신이 적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건 정당한 결투가 아니었다. 피터는 올라오라고 후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크가 피터의 손을 깨문 건 그때였다.

피터는 순간 당황했다. 그건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부당함 때문이었다. 피터는 도통 어찌해야 할 바를 졸랐다. 그저 충격을 받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아이들은 처음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 이와 같이 영향을 받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면서 자신들이 공정하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모가 아이에게 부당하게 대하더라도 후에 아이는 부모를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아이는 아닐 것이다. 세상 그 누구도 처음 겪었던 부당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물론 피터는 예외지만. 피터 역시 부당함을 자주 겪었지만 그는 어김없이 그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 생각에 그 점이야말로 피터가 세상 나머지 사람들과 진짜 다른 점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피터는 이번에 당한 부당함 역시 처음 겪는 것과 같았다. 그런 탓에 그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사이 후크의 쇠갈고리 손은 두 번이나 피터를 할퀴었다. 

- p154~155


"안녕, 웬디." 라는 말과 함께, 피터는 웬디를 바위에서 밀어냈다. 날아오른 웬디는 몇 분이 지나자 피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피터는 호수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제 발 디딜 틈도 없이 작아진 바위는 물에 잠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 위에는 엷은 빛줄기가 살며시 드리워졌다. 머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감미롭고 구슬픈 소리가 들려올 터였다. 그건 바로 인어들이 달을 부르는 소리였다.

피터는 보통 소년들과는 좀 달랐다. 하지만 그 역시 결국에는 두려워졌다. 바닷물을 가로질러 떨림이 전해지듯 피터의 몸에도 전율이 흘렀다. 하지만 바다에서는 수백 번이고 떨림이 계속되지만, 피터에게 떨림은 단 한 번뿐이었다. 피터는 다시 바위 위에 우뚝 섰다. 피터의 얼굴에는 예의 그 미소가 가득했고 가슴은 북을 치듯 쿵쿵 뛰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죽는 것도 정말 짜릿한 모험이 될 거야."

-p157~158


그날 밤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크가 처치하고 싶은 건 인디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꿀을 얻기 위해 연기를 피워 쫓아야 할 꿀벌들에 불과했다. 그가 원한 건 팬이었다. 팬과 웬디, 그리고 소년들, 아니 그중에서도 오로지 팬을 원했다.

후크가 한참 어린애인 피터를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로 오른손을 잃었다 해도, 그리고 그날 이후로 자신을 끈덕지게 쫓아다니는 악어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해도, 후크가 그렇게 냉혹하고 잔인한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건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실 피터에게는 이 해적 선장을 미쳐 날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피터의 배짱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외모도 아니고 또... 사실 이리저리 둘러말할 필요는 없다. 우린 그게 뭔지 잘 알고 있으며 이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피터의 건방짐이었다.

- p191


하지만 마지막으론 나온 웬디는 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후크는 웬디에게 모자를 들어 올려 정중히 인사한 뒤, 자신의 팔을 내주며 부하들이 아이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후크의 행동은 놀라우리만치 점잖고 품위가 있었으므로, 웬디는 마음을 뺏긴 나머지 우는 것도 잊었다. 웬디는 영락없는 어린 소녀였다. 

우리는 후크의 행동에 웬디가 황홀해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웬디의 그런 행동으로 결국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웬디가 거만하게 후크의 손을 뿌리쳤다면(그랬다면 우린 통쾌해하면서 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역시나 다른 소년들처럼 공중에 휙 던져졌을 테고, 그러면 후크는 아이들이 묶이고 있는 곳까지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후크가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슬라이틀리의 비밀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 비밀을 몰랐다면 후크는 피터의 목숨을 갖고 비열한 장난을 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 p194~195


후크는 망토를 살며시 땅 위에 벗어놓은 뒤, 사악한 피가 배어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면서 나무 쪽으로 갔다. 그는 담력이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잠시 멈춰 선 뒤 이마에서 촛농처럼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아야 했다. 그러고서 그는 미지의 땅속으로 내려갔다.

무사히 나무줄기 밑까지 도착한 후크는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다시 멈춰 섰다. 그의 눈이 어스레한 불빛에 익숙해지자, 집안의 온갖 살림살이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탐욕스러운 눈길이 유일하게 머문 곳은 그토록 헤맨 끝에 찾게 된 큰 침대였다. 그 침대에는 피터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땅 위에서 어떤 비참한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피터는 아이들이 떠난 후 한동안 유쾌하게 피리를 불었다. 그건 혼자가 되어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어찌 보면 애처로운 노력이었다. 피터는 웬디를 속상하게 하려고 약을 먹지 않기로 했다. 그것도 모자라 웬디를 더욱 괴롭히기 위해 이불도 덮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웬디는 밤이 되면 언제나 추울 거란 생각에 아이들에게 어김없이 이불을 덮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피터는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하지만 우는 대신 웃으면 웬디가 약 올라 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피터는 나보란 듯이 깔깔 웃어대다가 도중에 잠들고 말았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피터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은 다른 소년들의 꿈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피터는 몇 시간이고 서글프게 울부짖으며 꿈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건 피터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감과 연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웬디는 피터를 침대에서 데리고 나와 무릎베개를 해준 다음 자기만의 다정한 방법으로 달래주곤 했다. 그리고 피터가 좀 차분해지면 잠에서 깨기 전에 도로 침대에 눕혔다. 그건 그렇게 보살핌을 받은 걸 알면 피터가 창피해하할까 봐였다. 하지만 이번에 피터는 꿈도 안 꾸고 깊은 잠 속으로 곧장 빠져 들었다. 피터는 한 팔을 침대 밖으로 늘어뜨리고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작은 진주알 같은 이를 드러낸 입가에는 채 가시지 않은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피터는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후크에게 발견되었다. 후크는 조용히 나무줄기 밑에 서서 방안의 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음산한 마음을 움직일 연민의 감정 따윈 전혀 없었을까? 그는 완전히 악마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꽃(그렇다는 애길 들었다.)과 달콤한 음악(그는 하프시코드 연주 솜씨도 상당했다.)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평화로운 광경에 마음이 몹시 어지럽혀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보다 선한 본성에 이끌려 마지못해 나무 위로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가 그를 붙잡았다.

그건 바로 자고 있는 피터의 건방진 모습이었다. 헤벌린 입이며 축 늘어뜨린 팔이며 구부러진 무릎 말이다. 한데 모아서 보면, 그건 바로 건방짐의 결정체였고 그런 눈꼴사나운 모습에 민감한 사람은 다시는 봐선 안 될 광경이었다. 그걸 본 후크의 마음은 차갑게 굳었다. 만약 그가 분노로 폭발해서 백 개의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면, 그 조각 하나하나는 동정따윈 무시하고 곧장 잠자고 있는 피터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등불 하나가 침대를 어스레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후크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살며시 발을 내딛다가 앞을 가로막는 뭔가를 발견했는데, 그건 슬라이틀리의 나무에 달린 문이었다. 문이 나무줄기에 딱 맞지 않았던 터라 후크는 그 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후크는 문손잡이를 더듬어 찾았지만 너무 낮은 곳에 달려 있어서 손이 닿질 않자 불같이 화를 냈다. 온통 혼란스러워진 그의 머릿속에서는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피터의 몸과 얼굴이 더 커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문을 덜걱덜걱 흔들다가 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과연 그의 적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게 뭘까? 핏발 선 그의 눈은 가까운 선반 위에 놓인 피터의 약병을 발견했다.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본 그는 이제 저 소년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 들어왔음을 즉각 깨달았다.

산 채로 잡히지 않으려고, 후크는 언제나 품에 무서운 독약을 지니고 다녔다. 그 약은 독이 있는 나이테들을 모아다가 손수 섞어서 만든 것이었다. 그것들을 한데 넣고 끓여서 노란 액체로 만든 이 약은 과학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독약일 것이다.

후크는 피터의 컵에 이 독약을 다섯 방울 떨어뜨렸다. 그는 부끄럽다기보다는 너무 기뻐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또 그 짓을 하는 동안 그는 잠자는 피터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건 딱한 피터를 보고 맘이 약해질까 봐서가 아니라 단지 독약을 쏟지 않기 위해서였다. 독약을 다 탄 그는 흡족하게 자신의 희생양을 오랫동안 바라본 다음, 뒤돌아서 어렵사리 나무를 꿈틀꿈틀 기어올라 갔다. 나무 꼭대기로 모습을 드러낸 그는 흡사 악의 구멍에서 솟아 나온 악의 화신과도 같았다. 그는 가장 멋진 각도로 모자를 쓰고 망토를 두른 다음 망토의 한쪽 끝을 앞으로 당겨 잡았다. 마치 밤으로부터 가장 어두운 자신의 몸을 감추려는 듯. 그러고는 이상스럽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숲 속을 소리 없이 빠져나갔다.

- p198~200


앙숙인 둘은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후크는 다소 떨고 있었고 피터는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팬." 후크가 끝내 입을 열었다. "이건 다 네가 한 짓이야."

"그래, 제임스 후크." 당돌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건 다 내가 한 짓이지."

"건방지고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후크가 말했다. "지옥에 갈 준비나 하시지."

"어둡고 사악한 인간." 피터가 대꾸했다. "당신을 해치워 주겠어."

더 말할 것도 없이 피터와 후크는 결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양쪽 모두 기세가 팽팽했다. 최고의 칼잡이인 피터는 눈부시도록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가끔 피터는 적의 방어를 비켜서 찌르는 속임수 공격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라 팔이 짧아서 후크를 정통으로 찌르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반면 능수능란함은 절대 뒤지지 않지만 손목 놀림이 잽싸지 못한 후크는 무게감 있는 공격으로 피터를 제압하려 했다. 후크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바비큐에게 배웠던, 자신만의 장기가 된 세게 찌르기로 모든 걸 한 번에 끝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후크의 칼은 자꾸만 빗나갔다. 그래서 그는 거리를 좁혀 와, 지금까지 계속 허공만 긁어대던 자신의 쇠갈고리 손으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피터는 쇠갈고리 손 밑으로 몸을 웅크리면서 그의 갈비뼈를 있는 힘껏 찔렀다. 후크는 색깔이 이상한 자신의 피를 보고 놀란 나머지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후크는 결국 피터의 손아귀에 놓인 것이다.

"이때다!" 소년들이 일제히 입을 모았다. 그러나 피터는 품위 있는 몸짓으로 적에게 다시 칼을 집어 들 것을 청했다. 후크는 잽싸게 칼을 집어 들었지만, 피터가 올바른 품행을 보였다는 사실에 비참해졌다.

지금까지 후크는 자신의 적을 그저 지독한 악마 녀석쯤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문득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팬, 넌 도대체 누구며 무엇이냐?" 후크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난 젊음이자 기쁨이지." 피터는 생각나는 대로 대충 대답했다. "난 알에서 깨어난 작은 새야."

당연히 피터의 말은 순 엉터리였다. 그러나 비참한 후크에게 그 말은 피터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게다가 그건 올바른 품행의 절정 그 자체였다. 

"다시 붙어." 후크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후크는 인간 도리깨가 되어 싸우기 시작했다. 그 앞을 가로막는 자는 후크가 휙휙 휘두르는 칼에 애 어른 할 것 없이 죄다 두 동강 날 것 같았다. 그렇지만 피터는 후크가 일으키는 칼 바람에 떠밀려 그의 위험한 손아귀에서 벗어나듯 후크의 주위를 훨훨 날아다녔다. 피터는 자꾸만 화살처럼 달려들어 후크를 찔렀다.

이제 후크는 아무런 희망 없이 싸우고 있었다. 그토록 열정에 타오르던 가슴은 더 이상 목숨을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단 하나 간절한 바람이 있엇다. 그건 가슴이 채 식기 전에, 피터가 잘못된 품행을 저지르는 걸 보는 것이었다. 

싸우다가 갑자기 후크는 화약고로 달려가 그곳에 불을 붙였다.

"이제 이 분 안에 배는 폭발해서 산산조각이 날 거야." 후크가 외쳤다.

지금이야, 지금. 후크는 생각했다. 이제 그놈의 본색이 드러날 거야.

그러나 피터는 화약고에서 포탄을 들고 나와 그걸 조용히 배 밖으로 던질 뿐이었다.

후크는 도대체 어떤 품행을 보인 것일까? 잘못된 길로 들어선 그였지만, 우린 그를 동정하는 대신 그가 결국 자신이 속해있던 집단의 전통에 충실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소년들은 조롱 섞인 야유를 퍼부으며 후크의 주위를 날고 있었다. 그리고 후크는 갑판 위를 비틀거리며 그들을 향해 무기력하게 칼을 찔러댔다. 그러나 후크의 마음은 이미 이들을 떠나 있었다. 그는 오래전 운동장에서 수그려 걷던 일과 착한 일을 해서 교장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던 일과 담벼락 위에 앉아서 축구를 관람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신발은 옳았고 그의 양복 조끼도 옳았고 타이 역시 옳았고 양말 역시 옳았다.

아주 비겁하지만은 않았던 제임스 후크, 이제 그와 작별할 시간이 왔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단검을 치켜들고 유유히 날아오는 피터를 보자 후크는 바다에 몸을 던지기 위해 뱃전 울타리 위로 뛰어올랐다. 후크는 악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랐다. 우리가 일부러 악어 배 속의 시게를 멈추어놓아서 그가 이 사실을 모르게 했기 때문이다. 이건 마지막으로 후크의 체면을 조금이나마 지켜주기 위한 우리의 배려다.

그래도 후크는 최후의 순간에 하나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물론 우리가 그리 부러워할 일은 아니지만. 후크는 뱃전 울타리 위에 선 채, 바람을 가르며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피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후크는 피터에게 발을 쓰라는 신호를 보냈다. 결국 피터는 후크를 칼로 찌르는 대신 발로 차버렸다.

마침내 후크는 그토록 원하던 소원을 푼 것이다.

"잘못된 품행." 후크는 비아냥거리듯 외치더니 만족해하며 악어에게로 떨어졌다.

그렇게 제임스 후크는 죽어버렸다.

- p227~231


"모두 침대에 누워서 엄마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자. 우리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야."

이윽고 달링 부인은 남편이 잠들었는지 보기 위해 아이들 침실로 들어왔다. 침대는 모두 차 있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기뻐서 소리 지르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인은 아이들을 봤지만 진짜라고 믿지는 않았다. 알다시피 부인은 아이들이 침대에 누워 있는 꿈을 하도 자주 꿨던 터라, 그 광경 역시 아직까지 머물고 있는 꿈이라 생각했다.

부인은 난로 옆 의자에 앉았다. 그곳은 오래전에 부인이 아이들을 돌보던 곳이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왜 모르는 척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엄마!" 웬디가 소리쳤다.

"웬디구나!" 부인은 대답하면서도 이게 꿈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존이구나!" 부인이 말했다.

"엄마!" 마이클이 이제야 엄마를 알아보며 외쳤다.

"마이클이구나." 그러면서 부인은 다시는 품에 안지 못할 이기적인 세 악동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이들이 정말로 품에 들어온 것이다. 침대를 빠져나와 달려온 웬디, 존, 마이클이 정말로 부인의 품에 안긴 것이다.

"조지, 조지!" 이제야 말문이 열린 부인이 소리쳤다. 잠에서 깨어난 달링 씨는 이 놀라운 축복의 시간을 함께했고 나나도 급히 달려왔다. 세상에 그보다 더 감격스러운 순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문으로 방안을 지켜본 작은 소년 외에는. 피터는 그동안 다른 소년들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황홀한 기쁨들을 많이 느껴봤다. 그러나 창문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그 행복한 광경은 피터 자신은 영원히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 p243~244


한편 피터는 날아가기 전에 웬디를 한 번 더 만났다. 물론 피터가 직접 창문까지 간 건 아니고 도중에 그곳을 지나친 것이었다. 피터를 본 웬디는 창문을 열었다.

"여어이, 웬디, 잘 있어." 피터가 말했다.

"이런, 너 가는 거야?"

"응."

"피터, 우리 부모님한테 뭔가 좋은 말을 해드리고 싶지 않니?" 웬디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니."

"나에 대해선, 피터?"

"싫어."

그때 바짝 긴장하고 웬디를 지켜보던 달링 부인이 창가로 다가왔다. 부인은 다른 소년들을 모두 입양했으니 피터 역시 입양하고 싶다고 말했다.

"절 학교에 보내실 건가요?" 피터가 간사하게 물었다.

"그럼."

"회사에도요?"

"아마도."

"제가 곧 어른이 되나요?"

"눈 깜짝할 새에 그렇게 되지."

"전 학교에 가서 심각한 것 따윈 배우고 싶지 않아요." 피터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전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깼는데 수염이 나 있으면 어떡해요!"

"피터." 웬디가 달래듯 말했다. "네가 수염이 나도 난 널 좋아할 거야." 달링 부인은 피터를 향해 두 팔을 벌렸지만 피터는 그걸 뿌리쳤다.

"다가오지 말아요, 부인. 아무도 날 잡아서 어른으로 만들지 못해요."

"하지만 넌 어디서 살 거니?"

"웬디를 위해 지은 집에서 팅크랑 살 거예요. 요정들이 자기네가 잠자는 나무 꼭대기에다 집을 올려줄 거예요."

"아, 정말 멋져." 웬디가 너무 황홀해하며 말하는 바람에 달링 부인은 딸을 꼭 붙잡았다.

"난 요정들이 다 죽은 줄 알았는데." 달링 부인이 말했다.

"어린 요정들은 언제나 많아요." 요정이라면 이제 훤히 꿰고 있는 웬디가 설명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웃으면 요정이 태어나요. 그러니까 새로운 아기들이 계속 태어나는 한, 새로운 요정들도 언제나 태어나지요. 요정들은 나무 꼭대기 둥지에 살아요. 그리고 자주색 요정은 남자 애, 흰색 요정은 여자 애고, 파란색 요정은 자신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멍청한 아기들이에요."

"난 그렇게 재밌게 살 거야." 피터가 한쪽 눈으로 슬쩍 웬디를 쳐다보며 말했다.

- p247~248


놀림을 받긴 했지만 마이클은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걸 다른 소년들보다 오래 믿었다. 그래서 첫 번째 해가 끝나 갈 무렵 피터가 웬디를 데리러 왔을 때, 마이클 역시 그들을 따라 네버랜드로 갔다. 웬디는 옛날에 그곳에서 나뭇잎과 열매로 만든 원피스를 입고 피터와 함께 날아갔다. 단 한 가지, 웬디는 피터가 자신의 작아진 옷을 볼까 봐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피터는 자기 이야기만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걸 눈치 채지 못했다.

웬디는 피터와 엣날 일들을 신 나게 이야기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피터의 머릿속에는 옛날 모험을 밀어내고 새로운 모험들이 가득 차 있었다.

"후크 선장이 누구야?" 웬디가 그 무시무시한 적에 대해 이야기하자 피터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네가 후크를 죽이고 우리 모두를 구해 준 것 생각 안 나?" 웬디가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난 누군가를 죽이고 나면 다 잊어버려." 피터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웬디가 팅커 벨이 자길 보고 반가워했으면 좋겠다고 주저하며 말하자 피터는 이렇게 말했다. "팅커 벨이 누군데?"

"오, 피터!" 경악을 한 웬디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웬디가 설명을 해줘도 피터는 팅커 벨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요정은 수도 없이 많아." 피터가 말했다. "팅커 벨은 아마 죽었을 것 같은데."

아마도 피터의 말이 옳을 것이다. 요정들은 그리 오래 살지 못하니까. 그럼에도, 요정들은 하도 작아서 잛은 시간이라도 꽤 길게 느껴질 것이다.

피터에겐 지난 한 해가 마치 어제와 같다는 걸 알게 된 웬디는 마음이 아팠다. 그와 달리 웬디에게 지난 한 해의 기다림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피터는 변함없이 매력이 넘쳤고, 그들은 나무 꼭대기에 있는 작은 집에서 성공적으로 봄맞이 대청소를 했다.

다음 해에 피터는 오지 않았다. 웬디는 원피스가 작아져서 새 원피스를 입고 기다렸지만 피터는 오지 않았다.

"피터가 아픈가 봐." 마이클이 말했다.

"피터는 절대로 아프지 않는 거 알잖아."

마이클은 웬디에게 다가와 몸을 떨면서 속삭였다. "아마 피터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 웬디 누나!" 마이클이 울지 않았더라면 웬디가 그 말에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피터는 다음번 봄맞이 대청소 때 왔다. 이상하게도 피터는 자기가 한 해를 건너뛰고 온 걸 전혀 몰랐다.

그때가 소녀 웬디가 피터를 본 마지막이었다. 웬디는 좀 더 오랫동안 피터를 위해 성장통을 겪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상식 대회에서 상을 타자 웬디는 자신이 피터에게 솔직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무심한 소년 피터는 오지 않았다. 그러다 둘이 다시 만났을 때, 웬디는 결혼을 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웬디에게 피터는 추억의 장난감 상자에 내려앉은 작은 먼지에 불과했다. 웬디는 자라서 어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웬디를 딱히 여길 필요는 없다. 웬디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부류 중 하나였으니까. 웬디는 자신의 의지로, 다른 소녀들보다 하루빨리 어른이 된 터였다.

- p251~252


제인은 엄마와 함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서 텐트를 만든 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지금 뭐가 보여요?"

"오늘 밤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웬디가 대답했다. 지금 나나가 있었더라면 대화를 곧장 중단시켰을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아니에요, 엄마는 보고 있어요." 제인이 말했다. "엄마가 어린 소녀였을 때를 보고 있어요."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란다, 애야." 웬디가 말했다. "아아, 세월 한번 빠르게 지나갔구나!"

"세월은 엄마가 어렸을 때 날았던 것처럼 빨리 지나갔나요?" 아이가 영악하게 물었다.

"내가 날았던 것처럼! 제인, 그거 아니? 엄마는 가끔 내가 정말 날긴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단다."

"맞아요. 엄마는 날았어요."

"그렇게 날았던 옛날이 좋았더랫지!"

"그런데 엄만 왜 지금은 날지 못해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란다,얘야.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나는 법을 잊는단다."

"왜 그러는데요?"

"어른들은 더 이상 쾌활하지도 순수하지도 매정하지도 않으니까. 오직 쾌활하고 순수하고 매정한 사람만이 날 수 있단다."

- p253~254


어느 날 밤 비극이 찾아왔다. 때는 봄이었다. 제인은 엄마의 이야기까지 모두 듣고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웬디는 방에 다른 불빛이 없었던 터라 난롯가 가까이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닥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사이, 웬디는 꼬끼오 소리를 들었다. 그러더니 옛날처럼 창문이 스르륵 열리고 피터가 방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피터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고, 웬디는 그가 아직도 젖니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피터는 어린 소년이었고 웬디는 다 자란 어른이었다. 웬디는 난롯가에서 감히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웅크리고 있었다. 몸둘 바를 모르며 죄책감을 느끼는, 다 자란 여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안녕, 웬디." 피터는 뭐가 달라졌는지 눈치도 못 채고 인사를 건넸다. 피터는 순전히 자기 생각만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 웬디의 흰 드레스는 웬디가 피터를 처음 보았을 때 입고 있던 잠옷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안녕, 피터." 웬디가 되도록 몸을 작게 웅크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웬디 안에 있는 무언가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여자, 여자, 내게서 좀 사라져버려."

"어이, 존은 어딨어?" 침대 하나가 안 보이자 피터가 물었다.

"존은 이제 여기 없어." 웬디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마이클은 자는 거야?" 피터가 제인을 대충 쳐다보며 물었다.

"응." 웬디는 대답했다. 그러나 자신이 피터는 물론 제인에게도 솔직하지 못하다는 걸 느꼈다.

"걘 마이클이 아냐." 웬디가 재빠르게 고쳐 말했다.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막기 위해.

피터는 쳐다보았다. "어라, 그럼 새로운 아이야?"

"응."

"남자 애야, 여자 애야?"

"여자 애."

이제는 피터도 상황을 이해하겠지.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피터." 웬디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넌 나와 함께 날아가길 원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 그러면서 피터는 다소 굳은 표정을 덧붙였다. "지금이 봄맞이 대청소 때라는 걸 잊은 거야?"

웬디는 피터가 수도 없이 봄맞이 대청소 때를 잊었다는 걸 말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난 갈 수 없어." 웬디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난 나는 법을 잊어버렸어."

"내가 금세 가르쳐줄게."

"오, 피터, 쓸데없이 요정가루를 나한테 뿌리지 마."

웬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터는 끝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된 거야?" 피터가 움츠러들며 소리쳤다.

"이제 불을 켤 거야." 웬디가 말했다. "그래야 네가 날 똑똑히 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아는 한, 태어나서 처음으로 피터는 공포에 질렸다.

"제발 불 켜지 마." 피터가 소리쳤다.

웬디는 비참해진 소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웬디는 이제 피터 때문에 상처받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미소를 짓는 다 자란 여인이었다. 물론 그 미소는 젖어 있었지만.

웬디는 결국 불을 켰고 피터는 웬디를 똑똑히 보았다. 피터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인이 자기를 팔로 안아 올리려 하자 피터는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피터가 또 물었다.

웬디는 피터에게 사실을 말해야 했다.

"난 어른이 되었어, 피터. 난 스무 살 하고도 한참 더 되었는걸. 난 오래전에 어른이 되었어."

"안 그런다고 약속했잖아!"

"어쩔 수 없었어. 난 결혼도 했어, 피터."

"아니야, 아니야."

"맞아. 저기 침대에서 자고 있는 여자 애가 내 딸이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하지만 피터는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피터는 잠자고 있는 아이를 향해 주먹을 치켜들고 한 발짝 다가갔다. 물론 제인을 때리지는 않았다. 피터는 바닥에 앉아 엉엉 울었고, 웬디는 그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애를 먹었다. 옛날에는 그렇게도 솜씨 좋게 피터를 달랬건만. 이제 다 자란 여인에 불과한 웬디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방을 뛰쳐나갔다.

- p256~259


이 시기에 배리가 가장 인상적이고 주목할 만한 사회적 관계를 맺은 건 어른들이 아닌 켄싱턴 공원의 어린 소년들 셋이었다. 배리와 그의 아내는 켄싱턴 공원 근처의 렌스터 코너에 있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배리는 자신이 기르던 커다란 세이트버나드종의 개 포르토스를 데리고 켄싱턴 공원을 자주 산책했다. 1897년 여름에 배리는 공원에서 루엘린 데이비스 형제들과 산책을 하고 있는 보모 메리 호지슨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형제들은 네 살인 조지와 각각 세 살과 한 살인 잭과 피터였다. 이 소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배리는 마술을 보여 주며 그들과 놀아주기 시작했다. 그는 여름과 가을이 지나도록 이 소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틈날 때마다 요정, 해적, 마법의 섬, 이상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만찬 파티에서 배리는 소년들의 어머니인 실비아 루엘린 데이비스를 만났다. 그녀는 소설가 조르주 뒤 모리에의 딸이자, 배우인 제럴드 뒤 모리에(후에 후크 선장의 역할을 유명하게 만들었다.)의 누나였다. 당시 서른한 살이었던 아름답고 상냥한 젊은 여인 실비아 데이비스에게는 아서라고 하는 서른네 살의 유능한 변호사 남편이 있었다. 배리는 실비아가 자신이 켄싱턴 공원에서 만났던 데이비스 형제들의 어머니인 것을 알자마자 그녀에게 강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배리가 실비아를 이상적인 여인이자 어머니로서 사랑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배리가 실비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평생토록 받아들이고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이다.

배리와 데이비스 가족(후에 마이클(1900)과 니콜라스(니코)(1903), 두 명의 아들이 더 태어났다.) 사이의 관계를 침입적이고 침투적이며 조작적이고 강박적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사실 배리는 자신의 허구 작품을 조작하듯 그들의 삶을 취해서 '조작'했으며, 자신의 상상력과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변경하고 수정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배리가 괴물이나 독재자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니며, 그가 자신이 얼마나 침입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완전히 알고 있었다는 것도 아니다. 배리는 무척 충실하고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친한 친구들, 특히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충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강박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친절을 베풀 때면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사실, 아서 데이비스와 그의 어린 아들 가운데 하나인 피터는 배리가 식구들에게 관여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리는 한번 관계를 맺으면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실비아를 만난 후, 1898년이 되자 배리는 더 이상 소년들을 켄싱턴 공원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제 배리는 그들의 집을 방문해서 차를 마시거나 저녁 식사를 하기도 했다. 요정들에 관한 그의 이야기는 갈수록 발전했고, 그는 데이비스 형제 중 셋째인 피터의 이름과, 자유분방하고 흥청대는 행동으로 널리 알려진 목양의 신 팬의 이름을 결합하여 '피터 팬'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냈다. 물론 배리의 팬은 이 아르카디아의 신처럼 남성답고 방탕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와 달리 배리의 팬은 엄마로부터 쫓겨난 어린 소년이었으며, 날 수 있고 켄싱턴 공원의 요정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를 벗어나면 그는 힘을 잃었다.

- p19~20, 서문 중에서


아서 코난 도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토마스 하디, H. G.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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