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 'ㅅ'



페렐란드라

저자
C. S. 루이스 지음
출판사
홍성사 | 2011-07-22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낙원과도 같은 페렐란드라(금성)로 간 랜섬은, 그곳을 타락시키려...
가격비교


나니아 연대기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우주 3부작 중 두번째. 사실 첫번째인줄 알고 읽었는데 책을 편 순간 2권이라는 메시지가 뙇! 아놔...

전작인 침묵의 행성 밖에서 를 읽지 않아도 보는데 큰 무리는 없었으나, 초반에는 약간 헤맸다.


SF를 이제까지 읽으면서 이만큼 기독교적인 메타포가 가득찬 SF를 읽은 기억이 없는 거 같다. 종교에 관련된 SF는 의외로 찾으면 좀 있는데, 이렇게 성경적인(바이블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말 그대로 기독교의 성경적인) SF는 처음 본다. 분위기가 상당히 독특하고, SF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흔히 상상하게 되는 이미지하고도 많이 다르다.


C.S 루이스는 그냥 나니아 연대기 작가로 생각할 때는 몰랐는데, 예전에 '예기치 않은 기쁨'을 찾아 읽으려고 하니 이게 기독교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어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독교 사상가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페렐란드라는 금성을 지칭하는 소설 내의 단어이다. 전작인 '침묵의 행성 밖에서'는 말라칸드라(화성)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 거 같다. 하지만 화성과 금성은 지구에서 갈 수 있는 거리의 행성이라는 점에서 선택되었을 뿐인듯, 우리가 생각하는 화성과 금성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 중 페렐란드라는 기독교 창세기의 에덴동산을 연상케하는 배경이다. 마치 뱀의 유혹의 빠지기 전 하와의 모습을 형상화한듯한 초록 여인이 등장하고, 주인공 랜섬의 이미지는 예수를 연상케한다. 웨스턴은 하와를 꼬인 뱀의 이미지와 닮아 있다. 소설 내내 마치 선악과의 유혹의 빠지기 전의 에덴동산을 형상화하려는 듯한 저자의 꼼꼼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아주 따뜻하고 아름다우며, 또한 이색적이다. 페렐란드라의 땅에 관한 묘사, 과실에 관한 묘사, 초록 여인의 표정에 대한 묘사, 웨스턴의 인상에 대한 묘사까지.


이 우주 3부작은 루이스가 톨킨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우리 중 한 사람은 시간 여행에 관한 책을 쓰고, 다른 한 사람은 공간 여행에 관한 책을 쓰자"고 하여 나온 책이라고 한다. 루이스가 공간 여행을 택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 우주 3부작이다. 톨킨이 쓰기 시작한 시간 여행에 관한 책은 '잃어버린 길'이었는데 이는 미완으로 남았고, 다시 쓴 책이 바로 반지의 제왕이라 한다. 책들 사이에 숨겨진 재밌는 이야기들이 참 많다.


=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바다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었다. 영양처럼 생긴 동물이 부드러운 코를 겨드랑이에 들이밀자 무심코 쓰다듬었다. 웃음을 터트린 아까 그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쭉 떠다니는 섬의 물가에 앉아만 있었을 모습이었다. 랜섬은 그렇게 차분한 얼굴은 처음 보았다. 모든 면에서 인간의 모습인데도 정말이지 천상에서만 볼 듯한 얼굴이었다. 후에 그는 그것이 체념이 없어서라고 결론지었다. 지상의 얼굴들에는 깊은 고요와 함께 최소한이라도 체념이 깃들기 마련이니까. 이것은 폭풍우를 겪은 적이 없는 평온함이었다. 백치 같기도 하고, 불멸성 같기도 했다. 지상의 경험에 짓눌리지 않는 마음 상태일 터였다.

-p77


눈앞의 남자는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손가락을 힘 있게 움직인 것으로 볼 때 그는 틀림없이 웨스턴이었다. 그런 면으로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알아볼 수 없기도 하다는 점이 두려웠다.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오히려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개구리를 괴롭히다가 고개를 들자,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얼굴이 드러났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한 그는, 인간들이 시신을 볼 때 흔히 보이는 모든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표정한 입, 깜빡이지 않는 눈, 왠지 무겁고 무기체 같은 주름진 뺨이 분명히 말했다. '나는 당신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우리 사이에 공통점은 없소' 라고. 바로 이것이 랜섬의 입을 막고 있었다. 거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호소나 협박이 의미가 있을까? 사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확신이 모든 정신적인 습관과 믿기 싫은 욕망을 밀치고 의식 속을 파고 들었다. 완전히 다른 종류의 생명이 페렐란드라에서 웨스턴의 몸을 차지해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썩지도 않는 몸이었다. 웨스턴 자신은 없어진 것이다.

그것은 말없이 랜섬을 바라보더니 미소 짓기 시작했다. 악마 같은 미소에 대해 자주 들어 보았을 것이다. 랜섬 자신도 자주 말한 바 있지만 진짜 악마 같은 미소가 뭔지 모르고 한 말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 미소는 냉혹하지도, 분노에 차 있지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싹할 정도로 순수하게 반가움을 드러내면서 쾌락의 세계로 랜섬을 부르는 것 같았다. 마치 모든 인간이 그런 쾌락 속에 있는 것 같고 그 쾌락들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몰래 하는 짓도, 부끄러워할 짓도 아니었고, 공범자 같은 구석도 전혀 없었다. 그것은 선량함과 충돌하지 않았고, 마치 선은 없다는 듯이 무시했다. 랜섬은 이전에 본 것은 미온적이고 거북할 정도의 사악한 시도에 불과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이 존재는 전심을 다하고 있었다. 극단적인 악은 모든 갈등 단계를 지나서, 무서우리만치 순수함과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초록 여인이 미덕을 초월하듯 그것은 악을 초월했다.

-p159


랜섬은 오래 전 화성에서 오야르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그대가 여기 있는 방식과는 다르다."

생명체들이 그를 기준으로 볼 때는 움직이지 않지만 실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가 있는 이 움직이지 않는 세상 같은 행성ㅡ실제로 세상ㅡ이 그들이 볼 때는 움직이며 천상들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계곡과 나란히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가만히 서 있었다 해도, 그들은 랜섬이 보지 못하게 그 앞을 휙 지났을 것이다. 행성의 자전과 태양 주변의 공전으로 인해 두 배로 뚝 떨어졌을 것이다.

랜섬은 그들의 몸이 희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깨부터 다양한 색깔이 번쩍이며 목을 타고 올라 얼굴과 머리 위에서 깜빡거리더니, 깃털이나 후광처럼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그는 내게 이런 색깔들을 기억할 수 있다고, 다시 보면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시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했다. 우리와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도 똑같은 설명을 한다. 신체를 초월한 존재들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로 하면, 사실 그들은 우리의 망막에 영향을 주지 않고 뇌의 관련 부분을 직접 조작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실은 가시권 밖에 있는 스펙트럼의 색깔들을 눈이 받아들일 때 느끼는 감각들을 그들이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다. 엘딜마다 '깃털'이나 후광이 전혀 달랐다. 화성의 오야르사는 금속성의 차가운 아침 색깔들로 빛났다. 순수하고 딱딱하고 긴장감을 주는 느낌이었다. 금성의 오야르사는 따스한 광채로 빛나며, 풍성한 식물의 생명력 같은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랜섬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명화에서 묘사한 '천사'는 꽤 상상을 잘한 것이었다. 얼굴의 다채로운 변화가 인간 얼굴을 연상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각각의 얼굴에, 너무나 또렷해서 가슴 아리고 눈부셨던, 변화 없는 한 가지 표정이 박혀 있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엘딜들의 얼굴은 아이기나 섬(아테네 남쪽에 위치한 섬)에 있는 조각상들처럼 '원시적'이고 부자연스러웠다. 이 한 가지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랜섬은 단언할 수 없었다. 결국 자비로움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인간의 자비로운 표정과는 뜨악할 만큼 달랐다. 우리는 늘 인간의 자비심이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꽃피거나 애정 어린 상태로 치닫는 것을 본다. 그런데 여기에 애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천만 년 거리에서도 애정에 대한 희미한 기억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먼 미래에도 애정이 피어날 수 있는 뿌리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날카로운 번개처럼 순수하고 영적이고 지성적인 사랑이 나왔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과는 너무도 달라서, 그 표정은 자칫 사납다고 오해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294~295


=

' > 읽고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이먼드 챈들러 <당신 인생의 십 퍼센트> (1952)  (0) 2015.03.26
가장 잔인한 달  (0) 2015.03.23
치명적인 은총  (0) 2015.03.21
피터팬  (0) 2015.03.16
15소년 표류기 1, 2  (0) 2015.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