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 'ㅅ'



가장 잔인한 달

저자
루이즈 페니 지음
출판사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06-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치명적인 은총〉에 이은 2년 연속 애거서상 수상작 앤서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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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네... - T. S. 엘리엇, <황무지>


T. S. 엘리엇의 시에서 따왔다는 제목인 The Cruelest Month.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제 3권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제까지 봤던 가마슈 경감 시리즈 중 가장 재미있게 봤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감정의 골자가 공감가서였을까.


사람들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과 경쟁한다. 형제자매, 친구, 부모, 반려자 등.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경쟁하고, 패배했다고 느꼈을 때 상대를 질투하면서도, 그걸 인정하기 어려워서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자신마저 속이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꾹꾹 눌러담았던 감정들이 폭발하는 순간, 가공할만한 파괴력으로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 사건에서 사망한 사람은 하나이지만,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범인과 피해자를 제외한 여러 사람들 역시도 바로 이 감정에 시달린다. 심지어 주요 등장인물까지도. 가마슈와 미셸, 피터와 클라라까지. 마지막에 가마슈가 불러모은 사람들이 원으로 둘러앉았을 때, 범인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 교차를 설명해내는 부분이 재미있으면서도 섬뜩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힘들었을 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다. 3년전 연말에 이런저런 일로 너무 힘들어서 SNS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근황을 보는 것조차 너무 괴로웠다.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자리를 잘 잡고 즐겁게 사는 거 같은데 거기에서 나만 소외된 거 같은 그런 피해의식과 함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 비참해지는 나 자신이 가장 싫었다. 그래서 차라리 아예 보지 말자고 생각하고 한동안 모든 SNS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런 감정은 자신이 얼마나 단단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는가와는 또 별개의 문제인 거 같다. 상대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상대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상대를 질투하는 감정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손에 쥔 것의 소중함은 모른다.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에만 집중하고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런 감정이 자신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손에 쥔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을 때 그들을 축복하며 바라보는 것은 간단해보이지만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다시 3년전으로 돌아갔을 때 그 감정을 극복할 자신은 아직도 없다.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밖에는. 이런 때 한동안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한텐 도움이 되었던 거 같다. 아예 주변에 시선을 돌리는 것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것. 내가 유치한 감정의 노예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보단, 나란 인간이 이런 감정에 지배당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편해질 필요도 있다.


여하간 예전의 내 생각이 나서 참 공감하며 봤던 책. 루이즈 페니가 묘사하는 감정들이 참 좋다. 사람의 어두운 이면을 그리면서도,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것. 그런 저자의 시선이 바로 가마슈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드디어 이번 편부터 가마슈의 약점 역시도 드러나는데, 앞으로 주요 등장인물들을 둘러싼 일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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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게 녹은 카망베르 치즈가 메이플 시럽을 발라 훈제한 햄과 얇은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한 패스트리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황금빛 크로크므시외를 썰면서 피터가 웃었다.

- p14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 줄은 알겠네." 가마슈도 보부아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하지만 내 믿음은 날 안심시키지 죽이지는 않네. 내 믿음이 곧 나일세, 장 기. 그러니 날 해치진 않아."

"경감님은 영혼을 믿으시죠?" 보부아르는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성당에 다니시는지 모르겠지만 신은 믿으시겠죠. 그녀가 사악한 영혼을 불러내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천사들을 부르겠네." 가마슈가 미소를 지었다. "이봐, 장 기. 삶의 어떤 시점에서 우리는 모두 그 질문과 맞닥드려야 하네. 자네가 믿는 게 뭐지? 내게는 적어도 나만의 답이 있네. 내 답이 날 죽인다면 죽게 되겠지. 하지만 달아나지는 않을 거야."

"달아나시라는 게 아닙니다. 도움을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가마슈는 망설였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자네는 자네 일을 하게."

가마슈가 보부아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는 그 때 무엇이 가마슈를 죽일지 깨달았다. 사악한 영혼도, 악귀도, 유령도 아니었다. 그의 자존심이었다.

-p205~206


"가까이 있는 적이오. 심리학적인 개념이에요. 똑같아 보이는 두 개의 감정이 실제로는 정반대인 현상을 일컫는 표현이죠. 하나의 감정이 또 하나의 감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는 건강한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병들고 왜곡된 감정일 때 쓰는 말이에요."

(중략)

그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예를 들어 줄 수 있습니까?"

"세 가지 조합이 있어요." 이유도 모르는 채 머나 역시 앞으로 몸을 숙이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집착은 사랑인 척하고, 동정은 연민인 척, 무관심은 평정심인 척 속이죠."

(중략)

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과 연민이 제일 이해하기 쉬워요. 연민은 교감을 필요로 하죠. 고통받는 사람과 동등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요. 하지만 동정은 달라요.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은 그 누군가에게 우월감을 갖는 거라고 할 수 있죠."

"두 감정은 서로 잘 구별이 안 되는데요." 가마슈가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에요. 감정을 느끼는 당사자에게도 구별이 어렵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연민을 느낀다고 주장해요. 연민은 숭고한 감정 중 하나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건 동정이에요."

"그렇다면 동정이 연민 가까이 있는 적이겠군요." 곰곰이 생각해 본 가마슈가 천천히 말했다.

"동정은 연민처럼 보이고, 동정을 느끼면 연민을 느낄 때와 비슷한 행동 양상이 나타나죠. 하지만 연민과는 정반대의 감정이에요. 동정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연민이 들어올 틈은 없어요. 동정은 더욱 숭고한 감정인 연민을 파괴하고 몰아내 버리죠."

"실제로는 다른 감정을 느끼면서 더욱 숭고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자신을 속이기 때문이군요."

"자기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이는 거죠." 머나가 말했다.

"그럼 사랑과 집착은 어떻습니까?" 가마슈가 물었다.

"엄마와 아이가 대표적인 예죠. 어떤 엄마는 아이가 더 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준비를 해 주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죠.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게요.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돕죠. 이게 진정한 엄마의 사랑이에요. 하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 다른 엄마들은 아이에게 매달리죠. 아이와 같은 도시, 같은 동네로 이사를 가고요. 아이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아이를 질식하게 만들죠. 아이를 조종하고 죄의식을 빌미로 불구가 되게 하죠."

"불구가 되게 한다고요? 어떻게요?"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 걸러요."

"하지만 그건 엄마와 아이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겠죠." 가마슈가 말했다

"그렇죠. 우정이나 결혼에서도 생길 수 있어요. 다른 친밀한 관게에서도요. 사랑을 상대방을 위한 최선을 바라죠. 집착은 상대방을 인질로 삼고요."

가마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 인질은 달아날 수 없다. 달아나려 하면 비극만이 따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은요?" 그는 다시 앞으로 몸을 숙였다. "뭐였죠?"

"평정심과 무관심이오. 제 생각에 가장 끔직하고 가장 해로운 조합이에요. 평정심은 균형이에요. 일상을 압도하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그 일에 대한 강한 감정을 느끼게 돼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일을 극복할 능력도 있죠. 경감님도 보셨을 거예요. 아이나 배우자를 잃은 후에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을요. 심리학자다 보니까 전 항상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돼요. 믿기 힘들 정도의 고통과 슬픔을 겪는 사람들이오. 하지만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결국 본질에 닿게 되죠. 그걸 평정심이라고 해요. 상황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말하죠."

가마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당한 사건을 극복한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 살인범을 용서하는 사람도 있었다.

"평정심과 무관심은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여전히 두 감정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그가 물었다.

"생각해 보세요. 감정을 절제하는 모든 사람들을요. 불행 앞에 끄덕도 하지 않죠. 비극이 일어나도 냉정하게 대처해요. 정말로 그렇게 용기있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녀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정신이상자 같아요. 그냥 고통 자체를 느끼질 못해요. 왜인 줄 아세요?"

가마슈는 가만히 있었다. 뒤에서는 마치 대화를 방해하려는 것처럼 유리창에 폭풍이 거세게 부딪고 있엇다. 우박이 유리창에 내리꽂혔고, 마을 저편을 뒤덮고 있는 눈발이 유리창을 가득 메웟다. 그와 머니는 그들만의 세상에 철저히 갇힌 것 같았다.

"그들은 타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느끼지 않죠. 인간성의 덫에 싸여 있는 '보이지 않는 인간(흑인 차별 문제를 다룬 랠프 엘리슨의 소설 제목으로 백인들의 눈에 흑인은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취급당한다는 내용. 보이지 않는 인간은 흑인과 마찬가지로 본연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같아요. 그들의 내면에는 공허함뿐이죠."

가마슈는 피부에 찬기가 스며드는 걸 느꼈고 재킷 안의 팔에 소름이 돋고 있음을 알았다.

"문제는 한 감정가 다른 감정을 정확히 구별하는 데 있어요." 머나가 식료품상을 계속 주시하며 속삭였다. "평정심이 있는 사람들은 놀랄만큼 용감해요. 고통을 흡수해 온전히 느끼고 놓아 보내죠. 그리고 이거 아세요?"

"뭘요?" 가마슈가 속삭였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무관심하기만 한 사람과 똑같아 보여요. 냉정하고 차분한 데다 아주 침착하니까요.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존경하죠. 하지만 정말로 용감한 사람은 누구이고, 가까이에 있는 적은 누구일까요?"

가마슈는 난로로 덥혀진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순간, 그는 알아차렸다. 적은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p33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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