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 'ㅅ'



당신 인생의 십 퍼센트

저자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출판사
북스피어 | 2014-11-0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에스프레소 노벨라란? 진하고 강한 향기를 담은 에스프레소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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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의 에세이 및 중단편이 실려있다. 

전반부의 할리우드에 관한 에세이가 재밌었음.

할리우드의 전반적인 분위기, 할리우드에서 얼마나 작가가 홀대받는지, 작가가 어떻게 작가로서의 입지를 가지고 작업할 수 있을지 등.

챈들러 특유의 직설적인 에세이 너무 좋다, 정말ㅋㅋㅋ 더 보고 싶다...


뒤의 중단편들도 재밌었다. 개인적으로 진주는 성가셔 재밌게 봤음ㅋㅋㅋㅋㅋ 등장인물들이 귀여웠다ㅋㅋㅋ


=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문학적 수준에 대해서라면, 한 유명 출판사의 판권지로 미루어 볼 때 내가 구역질나게 겸손을 떨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엄청난 진지함은 이 직업의 괴로운 특징 중 하나다. 작가로서 나는 그런 진지함을 품고 나 자신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소위 '과거에 등장한 오락 문학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금은 계몽 문학만을 받아들이는 속물근성'이라는 것에서 운 좋게 벗어날 수 있었다. 만화의 단순한 유머들과 문인의 무기력한 정교함 사이에는 아주 너른 영토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추리물은 중요한 지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추리물이라면 무조건 싫어한다. 좋은 사람에 대한 추리물만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폭력과 사디즘을 서로 바꿀 수 있는 용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으며, 종속절과 까다로운 구두점과 가정법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탐정 소설을 하위 문학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다.

-p14


이 단편집에 실린 이야기들에는 쓰인 지 십 년, 혹은 십오 년이 지난 후에도 누군가를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추리소설은 과거의 그림자에 머물 필요가 없는 종류의 글이며, 고전에 빚진 바도 거의 없다. 현재 생존 작가가 <헨리 에즈먼즈The History of Henry Esmond>보다 더 나은 역사 소설을, <황금 시대The Golden Age>보다 더 나은 동화를,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보다 날카로운 사회적 소품을, <포인턴 저택의 소장품The Spoils of Poynton> 보다 더 우아하고 세련된 환기적 작품을,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보다 거대하고 풍부한 배경을 써내기란 불가능 그 이상이다. 하지만 <바스커빌 가의 개The Hound of the Baskerville>나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보다 더 그럴듯한 추리소설을 고안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것이다. 오늘날은 그러지 않기가 더 어려우리라. 범죄나 수사에 '고전'이란 없다. 전혀 없다. 고전의 평가 기준 틀 내에서 보자면 그것만이 유일한 판단 방법인데, 고전이란 그 형태의 가능성을 다 소진하고도 능가할 수 없는 작품을 말한다. 어떤 추리물도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에 근접한 작품도 극히 소수이다. 바로 이것이 다른 점에서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끊임없이 성채를 공격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p15~16


나는 할리우드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나 지속되는 이유도, 위상을 위한 어떤 쓰라린 투쟁으로부터 그것이 생겨났는지도, 형편없는 영화들로 돈을 얼마나 벌어들이는지도 알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그 결과 시나리오 에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런 시스템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점에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재능을 재능이게 하는 권리를 허락하지 않고 재능을 착취하는 것이 이 시스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권리는 허락될 수 없을 것이다. 재능을 파괴할 수만 있을 뿐이며, 정확하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ㅡ파괴할 것이 있을 때 말이지만.

-p38


할리우드에서는 작가를 의미 있는 예술가로 관객에게 내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에 담긴 어떤 예술성에 대한 작가의 결정적인 기여를 대중에게 숨기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광고판과 신문 광고란에서 작가의 이름은, 겨우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린 가장 미미한 단역배우의 이름보다 더 작게 실릴 것이다. 그리고 주중이 되어 광고 크기가 줄어들면 가장 먼저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의 입이나 라디오 홍보에서 가장 마지막에, 가장 적게 언급될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작업한 영화는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지만(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나는 영화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또 다른 영화사에서 내가 쓴 이야기로 제작하여 엄청나게 성공한 영화가 있는데, 홍보 과정에서 이야기의 몇몇 구절이 그대로 사용됐지만, 내 이름은 라디오든 잡지든 광고판이든 신문 광고든, 내가 보고 들은 매체에서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ㅡ엄청나게 많은 광고를 보고 들었는데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무시는 전혀 중요치 않다. 책을 내는 작가에게 할리우드에서 하는 부업은 하찮을 뿐이니까. 단, 자신의 일이 전부 할리우드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하찮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전문적인 시나리오 작가를 영화 제작에서 보조적인 역할로 전락시키려는 의도적이며 성공적인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겉으로는 대우를 받으면서도(한 방에 있을 때는) 본질적으로는 무시당하고, 작가가 이룬 가장 뛰어난 결과물에서조차, 그렇지 않았다면 배우, 제작자, 감독에게 돌아갔을 어떤 명예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p48~49


할리우드에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애처롭게도 많지 않다. 비현실적인 세계에 사는 즐거움, 대부분 형편없는 영화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마시는 협소한 무리와의 교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불친절한 식당들 중 어딘가에서 퍼 마시고 있는 유명 배우들을 보는 의심쩍은 즐거움 정도가 있을까.

할리우드 사회가 돈에 물든 여타 사회보다 더 지루하거나 방탕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럴 수 없음을 신이 아시리라. 하지만 위대한 예술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의 필수적인 기술에 평생 헌신하는 것치고는 그 보상이 상당히 약한 편이다. 진실은 이러리라 생각한다. 할리우드의 베테랑들이 자신이 얻는 것이 얼마나 조금인지, 얼마나 많은 우둔한 이기주의자에게 웃음을 지어야만 하는지, 얼마나 많은 위선적인 사람을 친구처럼 대해야 하는지, 진정한 성취를 이루어낼 가능성은 얼마나 적은지, 자신의 삶에 얼마나 많은 천박한 쓰레기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표면적인 친근함은 즐겁다ㅡ거의 모든 사람이 소매에 칼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영화 산업을 진지하게 여기는 남녀 동료들과 함게 근무하며 생기는 동료애는 작가의 외로운 영혼에 희미한 열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장을 보고, 원한다면 스스로 생각하기도 하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 쉽게 잊히고 만다. 할리우드에서는 심지어 수표조차 직접 쓰지 않는다. 그리고 제작사나 영화사가 좋아하리라 기대되는 것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이 있다고 본다. 여러 희망이 있다. 냉혹한 왕조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고, 독재적인 제작자는 이미 조금 확신을 잃었으며, 머리가 무거워 휘청이는 감독은 자기 영화사에서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이다. 얼마 더 지나면 테크니컬러조차 그를 구하지 못하리라. 부패하고 임시변통적인 시스템은 지나갈 것이며, 허풍스러운 거물들이 다음 사실을 알게 되리라는 희망도 있다. 시나리오는 작가들만이 쓸 수 있으며 오직 자부심을 가진 독립적인 작가들만이 좋은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음을, 그리고 현재 그런 사람들을 취급하는 방식은 영화가 살아가는 힘을 파괴할 뿐임을 알게 되리라는 희망이.

그리고 할리우드 작가들 스스로가ㅡ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ㅡ 영화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마추어나 항상 다른 사람이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하는 미숙한 작가들의 직업이 아님을 깨닫게 되리라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희망도 있다.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자들이 자신의 창의성, 상상력, 진실성을 바닥까지 짜내게 하는 것은, 기술자로서 작가들이 지닌 고유한 약점인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고액을 받는 시나리오 작가 중 사분의 일만이라도, 자력으로 총체적이며 촬영 가능한 시나리오를 써 내면서, 영화사의 간섭과 심의는 배우들에게 투자한 금액을 보호하고 명에 훼손과 검열에서 합리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정도만 받는다면, 제작자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 결합되는 다양한 기술들을 조화시키고 조정하는 자신의 진짜 역할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ㅡ으스대는 그의 영혼을 가엾게 여기길ㅡ자신이 쓰려고 했던 대로가 아니라(쓸 줄 안다면 말이지만), 구상되고 쓰인 대로 영화를 제작하는 수치스러운 과업을 이행하는 역할로 격하될 것이다.

-p49~52


요지는 형편없는 영화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나 심지어 영화는 평균적으로 다 형편없는지의 여부에 있지 않다. 영화라는 매체가, 그 영화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들이 경의를 품고 대할 만큼 위엄과 성취를 지닌 예술인가 하는 점에 있다. 영화를 조롱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영화는 대중적인 오락물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영화를 엄벌에 처했다며 만족해한다. 마치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지성인 대부분이 여전히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 연극은 아테나 시민들이 즐기던 대중적인 오락물이었다. 경제적, 지리적으로 한계는 있었지만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도 그러했다. 유럽의 대성당들은 오후를 즐길 목적으로 지어지지는 않았으나, 보통 사람들에게 미학적이며 정신적인 영향을 미쳤다. 늘 그렇진 않지만 오늘날에도 바흐의 푸가와 합창곡, 모차르트와 보로딘과 브람스의 교향곡,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스카를라티의 피아노 소나타, 그리고 한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음악이 라디오 덕에 대중오락이 되었다. 모든 바보가 대중오락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모든 바보가 만화보다 더 문학적인 무엇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예술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대중오락화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잊혀버린다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른다.

(중략)

하지만 영화는 가짜 예술이 아닌 것처럼, 문학이나 연극을 옮긴 것도 아니다. 영화는 그 모든 요소를 포함하지만 본질적인 구조상 음악에 훨씬 더 가깝다. 가장 멋진 효과가 정확한 의미와는 별개일 수 있다는 점에서, 장면의 전환이 가장 멋진 장면조차 더 감명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삭제할 수 없는 디졸브와 카메라 움직임들이 삭제 가능한 줄거리보다 감정적으로 훨씬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는 예술일 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수백 년간 진화되어 온 완전히 새로운 예술이다. 우리 세대가 크게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기도 하다.

-p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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