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 'ㅅ'



당신 인생의 십 퍼센트

저자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출판사
북스피어 | 2014-11-0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에스프레소 노벨라란? 진하고 강한 향기를 담은 에스프레소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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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의 에세이 및 중단편이 실려있다. 

전반부의 할리우드에 관한 에세이가 재밌었음.

할리우드의 전반적인 분위기, 할리우드에서 얼마나 작가가 홀대받는지, 작가가 어떻게 작가로서의 입지를 가지고 작업할 수 있을지 등.

챈들러 특유의 직설적인 에세이 너무 좋다, 정말ㅋㅋㅋ 더 보고 싶다...


뒤의 중단편들도 재밌었다. 개인적으로 진주는 성가셔 재밌게 봤음ㅋㅋㅋㅋㅋ 등장인물들이 귀여웠다ㅋㅋㅋ


=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문학적 수준에 대해서라면, 한 유명 출판사의 판권지로 미루어 볼 때 내가 구역질나게 겸손을 떨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엄청난 진지함은 이 직업의 괴로운 특징 중 하나다. 작가로서 나는 그런 진지함을 품고 나 자신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소위 '과거에 등장한 오락 문학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금은 계몽 문학만을 받아들이는 속물근성'이라는 것에서 운 좋게 벗어날 수 있었다. 만화의 단순한 유머들과 문인의 무기력한 정교함 사이에는 아주 너른 영토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추리물은 중요한 지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추리물이라면 무조건 싫어한다. 좋은 사람에 대한 추리물만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폭력과 사디즘을 서로 바꿀 수 있는 용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으며, 종속절과 까다로운 구두점과 가정법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탐정 소설을 하위 문학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다.

-p14


이 단편집에 실린 이야기들에는 쓰인 지 십 년, 혹은 십오 년이 지난 후에도 누군가를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추리소설은 과거의 그림자에 머물 필요가 없는 종류의 글이며, 고전에 빚진 바도 거의 없다. 현재 생존 작가가 <헨리 에즈먼즈The History of Henry Esmond>보다 더 나은 역사 소설을, <황금 시대The Golden Age>보다 더 나은 동화를,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보다 날카로운 사회적 소품을, <포인턴 저택의 소장품The Spoils of Poynton> 보다 더 우아하고 세련된 환기적 작품을,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보다 거대하고 풍부한 배경을 써내기란 불가능 그 이상이다. 하지만 <바스커빌 가의 개The Hound of the Baskerville>나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보다 더 그럴듯한 추리소설을 고안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것이다. 오늘날은 그러지 않기가 더 어려우리라. 범죄나 수사에 '고전'이란 없다. 전혀 없다. 고전의 평가 기준 틀 내에서 보자면 그것만이 유일한 판단 방법인데, 고전이란 그 형태의 가능성을 다 소진하고도 능가할 수 없는 작품을 말한다. 어떤 추리물도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에 근접한 작품도 극히 소수이다. 바로 이것이 다른 점에서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끊임없이 성채를 공격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p15~16


나는 할리우드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나 지속되는 이유도, 위상을 위한 어떤 쓰라린 투쟁으로부터 그것이 생겨났는지도, 형편없는 영화들로 돈을 얼마나 벌어들이는지도 알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그 결과 시나리오 에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런 시스템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점에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재능을 재능이게 하는 권리를 허락하지 않고 재능을 착취하는 것이 이 시스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권리는 허락될 수 없을 것이다. 재능을 파괴할 수만 있을 뿐이며, 정확하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ㅡ파괴할 것이 있을 때 말이지만.

-p38


할리우드에서는 작가를 의미 있는 예술가로 관객에게 내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에 담긴 어떤 예술성에 대한 작가의 결정적인 기여를 대중에게 숨기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광고판과 신문 광고란에서 작가의 이름은, 겨우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린 가장 미미한 단역배우의 이름보다 더 작게 실릴 것이다. 그리고 주중이 되어 광고 크기가 줄어들면 가장 먼저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의 입이나 라디오 홍보에서 가장 마지막에, 가장 적게 언급될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작업한 영화는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지만(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나는 영화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또 다른 영화사에서 내가 쓴 이야기로 제작하여 엄청나게 성공한 영화가 있는데, 홍보 과정에서 이야기의 몇몇 구절이 그대로 사용됐지만, 내 이름은 라디오든 잡지든 광고판이든 신문 광고든, 내가 보고 들은 매체에서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ㅡ엄청나게 많은 광고를 보고 들었는데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무시는 전혀 중요치 않다. 책을 내는 작가에게 할리우드에서 하는 부업은 하찮을 뿐이니까. 단, 자신의 일이 전부 할리우드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하찮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전문적인 시나리오 작가를 영화 제작에서 보조적인 역할로 전락시키려는 의도적이며 성공적인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겉으로는 대우를 받으면서도(한 방에 있을 때는) 본질적으로는 무시당하고, 작가가 이룬 가장 뛰어난 결과물에서조차, 그렇지 않았다면 배우, 제작자, 감독에게 돌아갔을 어떤 명예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p48~49


할리우드에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애처롭게도 많지 않다. 비현실적인 세계에 사는 즐거움, 대부분 형편없는 영화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마시는 협소한 무리와의 교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불친절한 식당들 중 어딘가에서 퍼 마시고 있는 유명 배우들을 보는 의심쩍은 즐거움 정도가 있을까.

할리우드 사회가 돈에 물든 여타 사회보다 더 지루하거나 방탕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럴 수 없음을 신이 아시리라. 하지만 위대한 예술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의 필수적인 기술에 평생 헌신하는 것치고는 그 보상이 상당히 약한 편이다. 진실은 이러리라 생각한다. 할리우드의 베테랑들이 자신이 얻는 것이 얼마나 조금인지, 얼마나 많은 우둔한 이기주의자에게 웃음을 지어야만 하는지, 얼마나 많은 위선적인 사람을 친구처럼 대해야 하는지, 진정한 성취를 이루어낼 가능성은 얼마나 적은지, 자신의 삶에 얼마나 많은 천박한 쓰레기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표면적인 친근함은 즐겁다ㅡ거의 모든 사람이 소매에 칼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영화 산업을 진지하게 여기는 남녀 동료들과 함게 근무하며 생기는 동료애는 작가의 외로운 영혼에 희미한 열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장을 보고, 원한다면 스스로 생각하기도 하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 쉽게 잊히고 만다. 할리우드에서는 심지어 수표조차 직접 쓰지 않는다. 그리고 제작사나 영화사가 좋아하리라 기대되는 것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이 있다고 본다. 여러 희망이 있다. 냉혹한 왕조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고, 독재적인 제작자는 이미 조금 확신을 잃었으며, 머리가 무거워 휘청이는 감독은 자기 영화사에서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이다. 얼마 더 지나면 테크니컬러조차 그를 구하지 못하리라. 부패하고 임시변통적인 시스템은 지나갈 것이며, 허풍스러운 거물들이 다음 사실을 알게 되리라는 희망도 있다. 시나리오는 작가들만이 쓸 수 있으며 오직 자부심을 가진 독립적인 작가들만이 좋은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음을, 그리고 현재 그런 사람들을 취급하는 방식은 영화가 살아가는 힘을 파괴할 뿐임을 알게 되리라는 희망이.

그리고 할리우드 작가들 스스로가ㅡ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ㅡ 영화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마추어나 항상 다른 사람이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하는 미숙한 작가들의 직업이 아님을 깨닫게 되리라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희망도 있다.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자들이 자신의 창의성, 상상력, 진실성을 바닥까지 짜내게 하는 것은, 기술자로서 작가들이 지닌 고유한 약점인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고액을 받는 시나리오 작가 중 사분의 일만이라도, 자력으로 총체적이며 촬영 가능한 시나리오를 써 내면서, 영화사의 간섭과 심의는 배우들에게 투자한 금액을 보호하고 명에 훼손과 검열에서 합리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정도만 받는다면, 제작자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 결합되는 다양한 기술들을 조화시키고 조정하는 자신의 진짜 역할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ㅡ으스대는 그의 영혼을 가엾게 여기길ㅡ자신이 쓰려고 했던 대로가 아니라(쓸 줄 안다면 말이지만), 구상되고 쓰인 대로 영화를 제작하는 수치스러운 과업을 이행하는 역할로 격하될 것이다.

-p49~52


요지는 형편없는 영화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나 심지어 영화는 평균적으로 다 형편없는지의 여부에 있지 않다. 영화라는 매체가, 그 영화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들이 경의를 품고 대할 만큼 위엄과 성취를 지닌 예술인가 하는 점에 있다. 영화를 조롱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영화는 대중적인 오락물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영화를 엄벌에 처했다며 만족해한다. 마치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지성인 대부분이 여전히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 연극은 아테나 시민들이 즐기던 대중적인 오락물이었다. 경제적, 지리적으로 한계는 있었지만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도 그러했다. 유럽의 대성당들은 오후를 즐길 목적으로 지어지지는 않았으나, 보통 사람들에게 미학적이며 정신적인 영향을 미쳤다. 늘 그렇진 않지만 오늘날에도 바흐의 푸가와 합창곡, 모차르트와 보로딘과 브람스의 교향곡,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스카를라티의 피아노 소나타, 그리고 한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음악이 라디오 덕에 대중오락이 되었다. 모든 바보가 대중오락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모든 바보가 만화보다 더 문학적인 무엇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예술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대중오락화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잊혀버린다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른다.

(중략)

하지만 영화는 가짜 예술이 아닌 것처럼, 문학이나 연극을 옮긴 것도 아니다. 영화는 그 모든 요소를 포함하지만 본질적인 구조상 음악에 훨씬 더 가깝다. 가장 멋진 효과가 정확한 의미와는 별개일 수 있다는 점에서, 장면의 전환이 가장 멋진 장면조차 더 감명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삭제할 수 없는 디졸브와 카메라 움직임들이 삭제 가능한 줄거리보다 감정적으로 훨씬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는 예술일 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수백 년간 진화되어 온 완전히 새로운 예술이다. 우리 세대가 크게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기도 하다.

-p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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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달

저자
루이즈 페니 지음
출판사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06-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치명적인 은총〉에 이은 2년 연속 애거서상 수상작 앤서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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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네... - T. S. 엘리엇, <황무지>


T. S. 엘리엇의 시에서 따왔다는 제목인 The Cruelest Month.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제 3권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제까지 봤던 가마슈 경감 시리즈 중 가장 재미있게 봤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감정의 골자가 공감가서였을까.


사람들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과 경쟁한다. 형제자매, 친구, 부모, 반려자 등.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경쟁하고, 패배했다고 느꼈을 때 상대를 질투하면서도, 그걸 인정하기 어려워서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자신마저 속이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꾹꾹 눌러담았던 감정들이 폭발하는 순간, 가공할만한 파괴력으로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 사건에서 사망한 사람은 하나이지만,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범인과 피해자를 제외한 여러 사람들 역시도 바로 이 감정에 시달린다. 심지어 주요 등장인물까지도. 가마슈와 미셸, 피터와 클라라까지. 마지막에 가마슈가 불러모은 사람들이 원으로 둘러앉았을 때, 범인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 교차를 설명해내는 부분이 재미있으면서도 섬뜩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힘들었을 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다. 3년전 연말에 이런저런 일로 너무 힘들어서 SNS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근황을 보는 것조차 너무 괴로웠다.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자리를 잘 잡고 즐겁게 사는 거 같은데 거기에서 나만 소외된 거 같은 그런 피해의식과 함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 비참해지는 나 자신이 가장 싫었다. 그래서 차라리 아예 보지 말자고 생각하고 한동안 모든 SNS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런 감정은 자신이 얼마나 단단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는가와는 또 별개의 문제인 거 같다. 상대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상대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상대를 질투하는 감정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손에 쥔 것의 소중함은 모른다.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에만 집중하고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런 감정이 자신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손에 쥔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을 때 그들을 축복하며 바라보는 것은 간단해보이지만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다시 3년전으로 돌아갔을 때 그 감정을 극복할 자신은 아직도 없다.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밖에는. 이런 때 한동안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한텐 도움이 되었던 거 같다. 아예 주변에 시선을 돌리는 것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것. 내가 유치한 감정의 노예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보단, 나란 인간이 이런 감정에 지배당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편해질 필요도 있다.


여하간 예전의 내 생각이 나서 참 공감하며 봤던 책. 루이즈 페니가 묘사하는 감정들이 참 좋다. 사람의 어두운 이면을 그리면서도,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것. 그런 저자의 시선이 바로 가마슈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드디어 이번 편부터 가마슈의 약점 역시도 드러나는데, 앞으로 주요 등장인물들을 둘러싼 일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할만하다.


=


부드럽게 녹은 카망베르 치즈가 메이플 시럽을 발라 훈제한 햄과 얇은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한 패스트리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황금빛 크로크므시외를 썰면서 피터가 웃었다.

- p14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 줄은 알겠네." 가마슈도 보부아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하지만 내 믿음은 날 안심시키지 죽이지는 않네. 내 믿음이 곧 나일세, 장 기. 그러니 날 해치진 않아."

"경감님은 영혼을 믿으시죠?" 보부아르는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성당에 다니시는지 모르겠지만 신은 믿으시겠죠. 그녀가 사악한 영혼을 불러내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천사들을 부르겠네." 가마슈가 미소를 지었다. "이봐, 장 기. 삶의 어떤 시점에서 우리는 모두 그 질문과 맞닥드려야 하네. 자네가 믿는 게 뭐지? 내게는 적어도 나만의 답이 있네. 내 답이 날 죽인다면 죽게 되겠지. 하지만 달아나지는 않을 거야."

"달아나시라는 게 아닙니다. 도움을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가마슈는 망설였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자네는 자네 일을 하게."

가마슈가 보부아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는 그 때 무엇이 가마슈를 죽일지 깨달았다. 사악한 영혼도, 악귀도, 유령도 아니었다. 그의 자존심이었다.

-p205~206


"가까이 있는 적이오. 심리학적인 개념이에요. 똑같아 보이는 두 개의 감정이 실제로는 정반대인 현상을 일컫는 표현이죠. 하나의 감정이 또 하나의 감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는 건강한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병들고 왜곡된 감정일 때 쓰는 말이에요."

(중략)

그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예를 들어 줄 수 있습니까?"

"세 가지 조합이 있어요." 이유도 모르는 채 머나 역시 앞으로 몸을 숙이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집착은 사랑인 척하고, 동정은 연민인 척, 무관심은 평정심인 척 속이죠."

(중략)

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과 연민이 제일 이해하기 쉬워요. 연민은 교감을 필요로 하죠. 고통받는 사람과 동등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요. 하지만 동정은 달라요.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은 그 누군가에게 우월감을 갖는 거라고 할 수 있죠."

"두 감정은 서로 잘 구별이 안 되는데요." 가마슈가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에요. 감정을 느끼는 당사자에게도 구별이 어렵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연민을 느낀다고 주장해요. 연민은 숭고한 감정 중 하나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건 동정이에요."

"그렇다면 동정이 연민 가까이 있는 적이겠군요." 곰곰이 생각해 본 가마슈가 천천히 말했다.

"동정은 연민처럼 보이고, 동정을 느끼면 연민을 느낄 때와 비슷한 행동 양상이 나타나죠. 하지만 연민과는 정반대의 감정이에요. 동정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연민이 들어올 틈은 없어요. 동정은 더욱 숭고한 감정인 연민을 파괴하고 몰아내 버리죠."

"실제로는 다른 감정을 느끼면서 더욱 숭고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자신을 속이기 때문이군요."

"자기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이는 거죠." 머나가 말했다.

"그럼 사랑과 집착은 어떻습니까?" 가마슈가 물었다.

"엄마와 아이가 대표적인 예죠. 어떤 엄마는 아이가 더 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준비를 해 주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죠.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게요.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돕죠. 이게 진정한 엄마의 사랑이에요. 하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 다른 엄마들은 아이에게 매달리죠. 아이와 같은 도시, 같은 동네로 이사를 가고요. 아이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아이를 질식하게 만들죠. 아이를 조종하고 죄의식을 빌미로 불구가 되게 하죠."

"불구가 되게 한다고요? 어떻게요?"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 걸러요."

"하지만 그건 엄마와 아이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겠죠." 가마슈가 말했다

"그렇죠. 우정이나 결혼에서도 생길 수 있어요. 다른 친밀한 관게에서도요. 사랑을 상대방을 위한 최선을 바라죠. 집착은 상대방을 인질로 삼고요."

가마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 인질은 달아날 수 없다. 달아나려 하면 비극만이 따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은요?" 그는 다시 앞으로 몸을 숙였다. "뭐였죠?"

"평정심과 무관심이오. 제 생각에 가장 끔직하고 가장 해로운 조합이에요. 평정심은 균형이에요. 일상을 압도하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그 일에 대한 강한 감정을 느끼게 돼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일을 극복할 능력도 있죠. 경감님도 보셨을 거예요. 아이나 배우자를 잃은 후에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을요. 심리학자다 보니까 전 항상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돼요. 믿기 힘들 정도의 고통과 슬픔을 겪는 사람들이오. 하지만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결국 본질에 닿게 되죠. 그걸 평정심이라고 해요. 상황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말하죠."

가마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당한 사건을 극복한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 살인범을 용서하는 사람도 있었다.

"평정심과 무관심은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여전히 두 감정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그가 물었다.

"생각해 보세요. 감정을 절제하는 모든 사람들을요. 불행 앞에 끄덕도 하지 않죠. 비극이 일어나도 냉정하게 대처해요. 정말로 그렇게 용기있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녀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정신이상자 같아요. 그냥 고통 자체를 느끼질 못해요. 왜인 줄 아세요?"

가마슈는 가만히 있었다. 뒤에서는 마치 대화를 방해하려는 것처럼 유리창에 폭풍이 거세게 부딪고 있엇다. 우박이 유리창에 내리꽂혔고, 마을 저편을 뒤덮고 있는 눈발이 유리창을 가득 메웟다. 그와 머니는 그들만의 세상에 철저히 갇힌 것 같았다.

"그들은 타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느끼지 않죠. 인간성의 덫에 싸여 있는 '보이지 않는 인간(흑인 차별 문제를 다룬 랠프 엘리슨의 소설 제목으로 백인들의 눈에 흑인은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취급당한다는 내용. 보이지 않는 인간은 흑인과 마찬가지로 본연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같아요. 그들의 내면에는 공허함뿐이죠."

가마슈는 피부에 찬기가 스며드는 걸 느꼈고 재킷 안의 팔에 소름이 돋고 있음을 알았다.

"문제는 한 감정가 다른 감정을 정확히 구별하는 데 있어요." 머나가 식료품상을 계속 주시하며 속삭였다. "평정심이 있는 사람들은 놀랄만큼 용감해요. 고통을 흡수해 온전히 느끼고 놓아 보내죠. 그리고 이거 아세요?"

"뭘요?" 가마슈가 속삭였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무관심하기만 한 사람과 똑같아 보여요. 냉정하고 차분한 데다 아주 침착하니까요.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존경하죠. 하지만 정말로 용감한 사람은 누구이고, 가까이에 있는 적은 누구일까요?"

가마슈는 난로로 덥혀진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순간, 그는 알아차렸다. 적은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p33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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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렐란드라

저자
C. S. 루이스 지음
출판사
홍성사 | 2011-07-22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낙원과도 같은 페렐란드라(금성)로 간 랜섬은, 그곳을 타락시키려...
가격비교


나니아 연대기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우주 3부작 중 두번째. 사실 첫번째인줄 알고 읽었는데 책을 편 순간 2권이라는 메시지가 뙇! 아놔...

전작인 침묵의 행성 밖에서 를 읽지 않아도 보는데 큰 무리는 없었으나, 초반에는 약간 헤맸다.


SF를 이제까지 읽으면서 이만큼 기독교적인 메타포가 가득찬 SF를 읽은 기억이 없는 거 같다. 종교에 관련된 SF는 의외로 찾으면 좀 있는데, 이렇게 성경적인(바이블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말 그대로 기독교의 성경적인) SF는 처음 본다. 분위기가 상당히 독특하고, SF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흔히 상상하게 되는 이미지하고도 많이 다르다.


C.S 루이스는 그냥 나니아 연대기 작가로 생각할 때는 몰랐는데, 예전에 '예기치 않은 기쁨'을 찾아 읽으려고 하니 이게 기독교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어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독교 사상가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페렐란드라는 금성을 지칭하는 소설 내의 단어이다. 전작인 '침묵의 행성 밖에서'는 말라칸드라(화성)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 거 같다. 하지만 화성과 금성은 지구에서 갈 수 있는 거리의 행성이라는 점에서 선택되었을 뿐인듯, 우리가 생각하는 화성과 금성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 중 페렐란드라는 기독교 창세기의 에덴동산을 연상케하는 배경이다. 마치 뱀의 유혹의 빠지기 전 하와의 모습을 형상화한듯한 초록 여인이 등장하고, 주인공 랜섬의 이미지는 예수를 연상케한다. 웨스턴은 하와를 꼬인 뱀의 이미지와 닮아 있다. 소설 내내 마치 선악과의 유혹의 빠지기 전의 에덴동산을 형상화하려는 듯한 저자의 꼼꼼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아주 따뜻하고 아름다우며, 또한 이색적이다. 페렐란드라의 땅에 관한 묘사, 과실에 관한 묘사, 초록 여인의 표정에 대한 묘사, 웨스턴의 인상에 대한 묘사까지.


이 우주 3부작은 루이스가 톨킨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우리 중 한 사람은 시간 여행에 관한 책을 쓰고, 다른 한 사람은 공간 여행에 관한 책을 쓰자"고 하여 나온 책이라고 한다. 루이스가 공간 여행을 택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 우주 3부작이다. 톨킨이 쓰기 시작한 시간 여행에 관한 책은 '잃어버린 길'이었는데 이는 미완으로 남았고, 다시 쓴 책이 바로 반지의 제왕이라 한다. 책들 사이에 숨겨진 재밌는 이야기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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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바다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었다. 영양처럼 생긴 동물이 부드러운 코를 겨드랑이에 들이밀자 무심코 쓰다듬었다. 웃음을 터트린 아까 그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쭉 떠다니는 섬의 물가에 앉아만 있었을 모습이었다. 랜섬은 그렇게 차분한 얼굴은 처음 보았다. 모든 면에서 인간의 모습인데도 정말이지 천상에서만 볼 듯한 얼굴이었다. 후에 그는 그것이 체념이 없어서라고 결론지었다. 지상의 얼굴들에는 깊은 고요와 함께 최소한이라도 체념이 깃들기 마련이니까. 이것은 폭풍우를 겪은 적이 없는 평온함이었다. 백치 같기도 하고, 불멸성 같기도 했다. 지상의 경험에 짓눌리지 않는 마음 상태일 터였다.

-p77


눈앞의 남자는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손가락을 힘 있게 움직인 것으로 볼 때 그는 틀림없이 웨스턴이었다. 그런 면으로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알아볼 수 없기도 하다는 점이 두려웠다.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오히려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개구리를 괴롭히다가 고개를 들자,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얼굴이 드러났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한 그는, 인간들이 시신을 볼 때 흔히 보이는 모든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표정한 입, 깜빡이지 않는 눈, 왠지 무겁고 무기체 같은 주름진 뺨이 분명히 말했다. '나는 당신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우리 사이에 공통점은 없소' 라고. 바로 이것이 랜섬의 입을 막고 있었다. 거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호소나 협박이 의미가 있을까? 사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확신이 모든 정신적인 습관과 믿기 싫은 욕망을 밀치고 의식 속을 파고 들었다. 완전히 다른 종류의 생명이 페렐란드라에서 웨스턴의 몸을 차지해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썩지도 않는 몸이었다. 웨스턴 자신은 없어진 것이다.

그것은 말없이 랜섬을 바라보더니 미소 짓기 시작했다. 악마 같은 미소에 대해 자주 들어 보았을 것이다. 랜섬 자신도 자주 말한 바 있지만 진짜 악마 같은 미소가 뭔지 모르고 한 말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 미소는 냉혹하지도, 분노에 차 있지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싹할 정도로 순수하게 반가움을 드러내면서 쾌락의 세계로 랜섬을 부르는 것 같았다. 마치 모든 인간이 그런 쾌락 속에 있는 것 같고 그 쾌락들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몰래 하는 짓도, 부끄러워할 짓도 아니었고, 공범자 같은 구석도 전혀 없었다. 그것은 선량함과 충돌하지 않았고, 마치 선은 없다는 듯이 무시했다. 랜섬은 이전에 본 것은 미온적이고 거북할 정도의 사악한 시도에 불과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이 존재는 전심을 다하고 있었다. 극단적인 악은 모든 갈등 단계를 지나서, 무서우리만치 순수함과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초록 여인이 미덕을 초월하듯 그것은 악을 초월했다.

-p159


랜섬은 오래 전 화성에서 오야르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그대가 여기 있는 방식과는 다르다."

생명체들이 그를 기준으로 볼 때는 움직이지 않지만 실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가 있는 이 움직이지 않는 세상 같은 행성ㅡ실제로 세상ㅡ이 그들이 볼 때는 움직이며 천상들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계곡과 나란히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가만히 서 있었다 해도, 그들은 랜섬이 보지 못하게 그 앞을 휙 지났을 것이다. 행성의 자전과 태양 주변의 공전으로 인해 두 배로 뚝 떨어졌을 것이다.

랜섬은 그들의 몸이 희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깨부터 다양한 색깔이 번쩍이며 목을 타고 올라 얼굴과 머리 위에서 깜빡거리더니, 깃털이나 후광처럼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그는 내게 이런 색깔들을 기억할 수 있다고, 다시 보면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시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했다. 우리와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도 똑같은 설명을 한다. 신체를 초월한 존재들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로 하면, 사실 그들은 우리의 망막에 영향을 주지 않고 뇌의 관련 부분을 직접 조작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실은 가시권 밖에 있는 스펙트럼의 색깔들을 눈이 받아들일 때 느끼는 감각들을 그들이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다. 엘딜마다 '깃털'이나 후광이 전혀 달랐다. 화성의 오야르사는 금속성의 차가운 아침 색깔들로 빛났다. 순수하고 딱딱하고 긴장감을 주는 느낌이었다. 금성의 오야르사는 따스한 광채로 빛나며, 풍성한 식물의 생명력 같은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랜섬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명화에서 묘사한 '천사'는 꽤 상상을 잘한 것이었다. 얼굴의 다채로운 변화가 인간 얼굴을 연상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각각의 얼굴에, 너무나 또렷해서 가슴 아리고 눈부셨던, 변화 없는 한 가지 표정이 박혀 있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엘딜들의 얼굴은 아이기나 섬(아테네 남쪽에 위치한 섬)에 있는 조각상들처럼 '원시적'이고 부자연스러웠다. 이 한 가지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랜섬은 단언할 수 없었다. 결국 자비로움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인간의 자비로운 표정과는 뜨악할 만큼 달랐다. 우리는 늘 인간의 자비심이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꽃피거나 애정 어린 상태로 치닫는 것을 본다. 그런데 여기에 애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천만 년 거리에서도 애정에 대한 희미한 기억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먼 미래에도 애정이 피어날 수 있는 뿌리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날카로운 번개처럼 순수하고 영적이고 지성적인 사랑이 나왔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과는 너무도 달라서, 그 표정은 자칫 사납다고 오해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29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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